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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 단상

2009/08/04 09:37 | Posted by <소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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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갈 때마다 해운대에 간다. 그전에는 꼭 그러지는 않았었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해운대에서 아침을 맞고, 하루 종일 해운대시장, 53사단 본부 입구, 장산공원, 미포 등지를 돌아다니고 새삼 '해운대의 힘'을 깨달았다. 

(92년 가을부터 94년 봄까지 매일 해운대에 '출근' 했었다. 그때는 바다 색깔이 매일, 왜, 달라지는지를 배웠었다. 그럼에도 여름엔 해운대를 피했다. 복잡하니까.)

 

11일만에 400만을 돌파했다 한다. 관객들 중에 50-60대가 많아서 흥행성 높은 영화라는 점을 실감하면서 영화를 봤다. ‘부산성’이라는 지역성을 전면에 내세운 <친구>나, ‘자연’과 한국의 '문화-정치'의 모순을 다룬 <괴물> 같은 흥행작과 비교해볼 요소가 많다고 생각된다.
통상의 ‘재난 영화’라 볼 수 없고, 뭔가 한국적인 ‘재난 영화’ 문법을 구축한 것인데, 곱게 봐주기 어려운 점도 많았다.


* 정밀하지 못한 상상력 :
진짜 쓰나미가 부산에 닥친다면? ‘재난 영화’는 어때야 되는 건가? 뭔가 과학적이어야 하지 않은가? 빈 데가 너무 많지 않은가?

* 수준 이하의 드라마 :
감독의 인간관이 의심스럽다. 1시간 가량 진행되는 서론을 보다가 지친다. 그 서론은 대부분 허접하다.  


* 썰렁한 코미디 :
악다구니와 슬랩스틱을 포함한 수준 이하의 코미디, 그러나 웃어주는 50ㆍ60대 관객


* 발전한 D-CG : 물에 잠긴 미포. 감전사하는 사람들. 재밌다.
바닷물에 깨지는 고층빌딩들. 공중 부감신으로 빅스케일의 해안을 잡아준다.

 

* 해운대 :
미포에서 수영만까지. 그리고 고층 빌딩들. 해운대의 폭이 나름 잘 포착된 듯하다.
해운대는 그 물리적 공간 외에도 경관적 의미가 2000년대에 들어 엄청나게 확장됐다.
노무현 정권과 부산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 유서 깊은 장소를 이전과 다른 '명소'로 주조해냈던 것이다.

신시가지가 생겼고, APEC이 열렸으며, PIFF가 자리를 잡았으며, 광안대교와 고층빌딩이 늘어섰다. 더 많은 사람이 여기를 찾는다. 그 장소는 문화정치에 관한 사유와 영화화의 대상으로서 충분히 값어치 있다. (cf. 그런데 고래불해수욕장 사장도 해운대만큼 크다.)

* <괴물>, 그리고 그 한강과 비교하면? :
아마 <괴물>의 발상법(...에 ...가 산다면? ...에 ...가 벌어진다면?)이 이런 영화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운대>는 스케일이 더 크다. <괴물> 못지 않은 좋은 상품이라 흥행할 것이다.
그러나 주제의식과 ‘이야기’에서 <괴물>과 비교될 수 없다. 드라마가 약해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감독은 뭘 말해보고 싶었을까? 119 대원을 존경하자? 쓰나미 같은 재난에 미리 대비하자? 해운대만 가지말고 경포대나 고래불도 가자? 머리가 빈 것 같다. 

 

* 진짜 그런 규모의 쓰나미가 온다면 :
영도는 어떻게 되나? 신선대와 남항 부두는 어떻게 될까?


* 광안대교 : 오우... 감독은 왜 이 대교를 끊어버리고 싶었을까? 이제 이 다리는 부산의 ‘좋은’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것은 분명 흉물이었다.

* 콘테이너 선박 : 이에 대한 묘사도 굿. 콘테이너 선박과 운반 트럭은 분명 부산의 또다른 상징이다. 감독은 부산에 대해 안다.

* 하지원 아비의 사망일 : 동남아 쓰나미 때 죽은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제삿날은 여름인가? 내가 잘못 본 건가?

 

2>

* 이민기 : 완벽한 부산어, 좋은 표정. 이 영화 최대의 수혜자가 아닐까?

* 하지원 : 참 예쁘지만 항상 뭔가 부족하다. 그런데, 원래 목소리 이랬나? 덜 듣기 싫은 여성용 부산 사투리를 구사한다.

* 이화여대생, 아니 삼수생 : 목소리 정말 듣기 싫네. 감독 탓이다.  

* 설경구 : 욕봤다. 주인공인데 특별한 매력이 없다.

* 엄정화ㆍ박중훈 : 왜 이들이어야 했나? 그들의 안 어울리는 역할이 안쓰럽고, 좋은 배우들인데... 내가 괜히 미안해지더라.


* 김인권 : 좋은 연기자다.

* 그외 조연들 : 부산 사투리를 쓸 수 있는 배우들을 대거 동원했다. 송강호나 조재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 특별히 이대호 : 굿!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야구장 풍경 묘사는 안 그랬지만) 이대호가 부진할 때 부산 사람들이 어떻게 욕하는지도 나름 리얼했다. 감독은 사직고 출신이다. <해운대>는 <친구> <사생결단>처럼 부산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3>

* 부산 사람에 대한 묘사 : 도무지 ‘애정이 있나?’ 싶었는데... 감독의 이력을 보니... 좋은 시나리오도 가끔 쓰고 했는데... 쯔쯔. 영화의 부산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 ‘직정’ ‘직입’ 그 자체다. 실제로도 그러할까?

 

* 부산에 대한 사유 :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어떻게 밀고 나가야 되는가? 나갈 수 있는가? 최근에 "부산 독립선언"이라는 책도 나왔다. 복잡하다. 곽경택의 드라마 <친구>를 보니 더 그렇다. <똥개>까지는 좋았는데, 곽씨의 고착은 너무 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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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초반은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말도 안되는 우연의 연속,

선우환(이승기 분)의 말도 안되는 쓰레기 짓,

백성희(김미숙 분)의 말도 안되는 악한 계모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 끝난 것을 통탄하며, 어쩌다 이런 드라마가 후속작인가,

내 주말 밤의 낙은 이제 없나..생각했다.

 

그런데 좀 지난 뒤, 정말 볼 게 없어서 우연히 다시 틀어 보게 된 <찬란한 유산>은

생각보다 '정상'을 찾아 있었다.

 

<1박2일>을 통해 다져진 '건전한 청년' 이미지의 이승기나

<봄의 왈츠>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가진 외양때문에 늘 '기대주'가 되어왔던 한효주도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의 캐릭터는 닳고 닳은, 드라마에서 써먹을 만큼 써먹은

그런 캐릭터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우는' 고은성(한효주 분)이나

인간 말종에서 차츰 인간다움을 회복해 가는 선우환, 뭐 새로운가?

나쁜 남자가 못되게 굴다가 주인공 캔디 여성에게 빠지고, 그러면서 정신 차리는.

흔하디 흔한 드라마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은

승미(문채원 분)과 선우환의 엄마 오영숙(유지인 분), 선우정(한예원 분)의 '인간다움'이다.

그들은 악역이며 은성의 '장애물'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미워하긴 힘들다.

 

영숙과 정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인 은성에 의해

할머니의 유산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이 은성을 미워하는 수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미움정도이다.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며느리를 다 모른척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웬 듣보잡에게 다 주겠다고 유언장을 고쳤다.

누가 그런 듣보잡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미워하다가도, 동생 은우를 잃어버렸고, 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은성의 개인사 앞에서는 "쟨 왜 인생이 저렇게 기구해?"하며

투덜거리듯 그녀를 딱해한다.

 

그들이 은성을 완전히 내치는 순간은

성희로부터 은성이 할머니에게 고의적으로 접근했으며

은성이란 아이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않는

무서운 아이라는 모함을 듣고 난 뒤이다.

이들은 너무도 순수해서, 성희같은 지략가의 모략 앞에서

쉽게 넘어갔을 뿐, 뼛속부터 못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은성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얘기에

소름끼쳐 할 뿐이다.

영숙의 친구인 성희의 말을 굴러들어온 돌 은성의 말보다 믿는 건 당연하니까.

 

한편 승미는, 은성의 안타고니스트이지만 너무나 설득력 있는 악역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딱 하나이다. 선우환.

그녀는 그를 얻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지만 

그러기 위해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의 패턴들은

우리가 흔히 트렌디 드마라들에서 보아왔던 무조건 나쁘고, 유치하고, 바닥까지 드러내는

그런 악역의 행동들이 아니다.

(그녀의 비음 섞인 굵은 목소리에도 끌리고 아직 정돈되지 않은 얼굴선도 사랑스럽다.

<바람의 화원>에서 봤을 때부터, 내가 김아중 이후 남몰래 끌려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엄마 백성희의 끝간 데 모르는 돈과 영달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엄마,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어"라면서.

그런데 그럴 때 백성희의 대응은

"그래, 내가 못된 년이다. 그렇지만, 너, 환이를 생각해봐라. 내 선택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어?"

라는 것이다.

그러면 승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성희가 만들어 놓은 이 악랄한 상황을

그저 눈물흘리며 받아들인다.

 

죽지 않은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사망보험금을 은성 몰래 다 가로챈것,

먼 지방 땅에 은성의 동생(은우)을 버린 것, 은성에겐 단 한푼도 나눠주지 않고 자기네만을 위한 돈을 감춰뒀다가 그럴듯한 아파트를 구해 사는 것...이런 성희의 행동들에 의해

은성은 끝간데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면 승미는 엄마의 대놓고 하는 악행 덕에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환과의 관계도 원하는 대로 지속할 수 있다.

그때문에 승미는 정작 엄마의 악행 앞에서 비난과 눈물을 일삼으면서도

결국은 엄마가 만들어 놓은 '비열한' 상황 속에 함몰되고 만다.

 

승미는 차츰 더 악해진다.

왜냐하면 환이 은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를 비난하면서도 엄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던 승미는

그를 얻기 위해서, 엄마와 공조하여 은성을 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과 모함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행동 뒤에도 그녀는 너무나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누가 승미를 욕할 수 있을까.

그녀의 악행은,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을 위해 일어난 것들이다.

우리들 모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선

그녀 정도의 거짓말과 모함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양심때문에 생각은 해도 실행은 못할테지만.)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가진 양심 수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녀를 보며 '저런 못된 년'이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 드라마를 바라보면

그녀는 한없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마음을 주지 않는 한 남자때문에 그녀가 겪는 가슴앓이.

그래서 그녀는 악역임에도 미움을 받기보단 안쓰럽다.

 

이러한 면들 때문에 이 드라마는 초반의 무리수들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이 있는 드라마로 인정받는다.

성희의 돈에 대한 욕망, 승미의 환에 대한 욕망,

세상 물정 모른 채 살던 부르조아 영숙과 정의 단순성은

악역들 어느 하나 무조건 미워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그야말로 '그럴 만 하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막장드라마'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뱀발)씨X새 주말 드라마는 <가문의 영광>에 이어서

계속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그리려 한다.

'진성설농탕'으로 나오는 '신선설농탕'이

실제로 그렇게 노숙자들, 독거노인 들에게 지속적인 자원봉사를 하고

혈족계승이 아닌 기업이념과 윤리에 따라 기업을 운영할 새로운 후계자를 양성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에 우리가 속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이 그랬듯

<찬란한 유산> 역시 기업과 재벌들을 '계몽'할 수 있다면 좋은 드라마이다.

이 두 드라마에서처럼 유산은 자식, 손자라서 물려주는 것이어선 안된다.

도덕성과 윤리가 기업이윤보다 우선시되는 기업, 재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에게 환원해야 한다.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이런 기업이 좋은 기업이라는 사실, 기업이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는

이 시대의 수많은 (실제/잠재)노동자들이 이러한 드라마들을 통해 모두 알아야 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평생 '사측'이 될 가능성이 없음에도 어려서부터 '진리'로 체화해 온 우리들은

이런 드라마를 통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쌍용자동차의 직원, 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그들의 투쟁이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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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살에 대해서 '그러할 용기로 살아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겠는가'를 아쉬워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다르다.

'앞으로 자식교육 똑바로 시키겠습니다.' 어느 아줌마 조문객이 대한문 노대통령 분향소에
남긴 고인에 대한 글이다.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글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나는 한참을
의아해 했다. 그리고는 이 말이 우리가 요즘 거의 듣지도 하지도 않는 말이라는 것을 곧 깨달
았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잘 살 것'을 요구해왔지 '똑바로 살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행여나 자식들
이 옳은 길을 가다가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어른들의 마음
과 가슴을 장악한 지배이데올로기였다.

무언가 잘못한 사람의 부모들에게 '당신,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쇼!'라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집
으로 돌아와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기회를 잘 타고 시험을 잘 보고 '잘난 친구'들을
 사귈지를 걱정하였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죽음은 이 아줌마 조문객이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겠다'라는 결연한 의지
를  글로 남기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 학부모가 이런 글을 스스로 남기도록 한 것은 엄청난 일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그 이름도 후세에 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에 스러져가는 동안 일제와 결탁하여 치부한
 자들이 반민특위의 위기를 돌파하고 다시 군사독재시대의 고도성장을 거쳐 우리 사회의 '지도
층'으로 자리잡았다. 그 뒤틀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옳은 것'을 자신있게 주장할 용기를 잃어갔
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용기의 부재를 성숙함으로, 조직성으로 추앙하게 되었다.

일상의 대화에서도 타인의 말에 반대를 하는 것은 너무 쉽게 '빡빡함'으로, 조금이라도 권위가
있는 사람의 말에 대한 반대는 '버릇없음'으로 여겨졌다. 누구나 '법을 지키면 손해본다'고 수군
거리면서도 사법제도를 바꾸려다 '손해'를 보려는 사람보다는 손해를 보지 않기기 위해 법을 회
피하는 기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왕따'를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추구
하였다. 누구도 3당 합당 때의 그처럼 수많은 동료들을 버리고 신념을 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이다.

부산에서 낙선을 거듭하던 시절의 노무현을 서울대 출신 386운동가들마저도 왕따시킬 때 노무
현은 '친구들을 사귀려고' 원칙을 굽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대통령 취임을 통해 우
리 역사 속에서 흔치 않은 '사필귀정'을 실현해 보였고 자신의 취임 일성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
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살아서 가려던 길을 갔다. 그 길은 노 대통령 영결식의 와중에도 경영권 편법
상속에 대한 무죄판결을 받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사회의 '주류' 그리고 법원이 방패가
 되고 검찰이 창이 되어 지켜주던 '주류'에 대한 '거부'의 길이었다. 예상치 못한 개인적 비리 의
혹으로 자신이 가려던 길이 막히자 그는 생명을 내던지며 그 길을 뚫었다.

운동권과 노동계의 수많은 열사들이 죽음으로 '저항'하였지만 학부모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도리어 '제발 너는 저렇게 되지 말아라'며 자식들이 불의에 눈감고 살기를 바랬다.

노 대통령은 죽음으로 학부모들에게 각인시켰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지금부터라도 당장 자식들에게 '잘 살기'를 가르치던 것을 중단하고 '올바르게 살기'를 가르치
기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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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

2009/06/04 08:38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검찰수사 도중의 ‘자살’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검찰수사가 형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영장주의와 자기부죄거부권이 존재한다. 영장주의란 체포, 구속, 압수수색과 같은 개인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제약은 수사기관과는 독립된 법관이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이나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 등을 영장을 통해 인정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헌법적 원리이다.

묵비권은 헌법적 권리
자기부죄거부권이란 피고나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의해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헌법적 권리를 말하며 소위 ‘묵비권’으로 불리워진다. 이 권리는 피의자의 신체적 자유나 사생활의 절차상의 보호를 넘어서 훨씬 더 섬세하고 실체적으로 피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 즉 피의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진술강요도 용납되지 않아 강압적이거나 다른 권리침해가 없어도 불법이 되며 이를 통해 취득된 진술은 증거력이 부인된다. 기실 진술이라 함은 뇌와 입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물리적인 강제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진술은 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요행위가 합법적인 영장에 의한 구금 하에서 이루어졌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자기부죄거부권도 검찰이 강압적인 신문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규범으로 작용한다. 묵비권의 보호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예컨대 미국에서는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묵비권을 선언하면 모든 신문은 중단된다. 이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 신문을 통해 취득된 진술은 모두 증거력이 거부된다.
뿐만 아니라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 피고의 묵비권 행사는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지 않는다. 입증에 대한 책임은 검찰이 가지고 있고 피의자는 자기파괴에 이르는 입증에 협조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피의자신문은 피의자가 진정으로 원할 때만 이루어진다. 결국 피고가 검찰에게 진술을 하는 경우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검찰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죄과를 줄이려 할 때뿐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전혀 피의자의 진술에 의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증거를 취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검찰, 법원 그리고 언론이 영장주의와 묵비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검찰은 우선 노대통령의 입을 통하지 않고 ‘포괄적 뇌물죄’의 증거들을 독자적으로 찾아야만 한다. 물론 검찰은 형사소송법 제215조 상의 ‘범죄수사에의 필요성’을 입증한다면 봉하마을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대통령이 받은 정신적 압박의 정점이 된, 김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 시간에 이르는 버스여행 뒤에 다시 새벽 5시에 돌아오는 형벌과도 다름없는 수사는 없었을 것이다.

출두거부도 문제 안돼
물론 검찰이 노대통령이 출두요구에 불응한다면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상의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를 입증하여 체포와 같은 더욱 강제력 있는 수사도 가능하였을 것이고 (구속영장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으므로 발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노대통령은 굴욕적인 검찰출두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상사회에서는 노대통령은 출두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체포영장의 발부가능성이 낮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실제로 정당하게 영장을 받아낼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리한 증거는 모두 공개해왔던 검찰의 관행에 비추어 그러한 증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노대통령은 출두거부에 대해 아무런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도 이에 대해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이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비극이 ‘명예롭게 묵비권을 행사할 자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되길 빈다. 물론 ‘기회’라는 말을 붙이기에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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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석증때문에 보름 전쯤 담낭적출술을 받았다. 나름 전신마취도 하고 하는 '진짜' 수술이었지만 요즘의 의학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3박4일이면 퇴원할 수 있는 병이었는데, 나는 좀 특이한 상황때문에 9일만에 퇴원을 하게됐다. 이 특이한 상황이란  처음의 나를 담당한 진료과목이 '내과'였다가, '외과'로 트랜스퍼되었던 것. 처음엔 췌담관 내시경 조영술을 하면서 담도나 담낭에 있을 지 모르는 돌들을 찾아내고, 돌이 발견되면 그것을 제거하는 간단한 내과적 '시술'로 끝날 줄 알고 학기중에 겁없이 입원을 했었다. 그런데 내시경을 넣어 막상 몸 안을 보니, 담낭(쓸개)쪽에 돌이 너무 많아서 외과적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래서 그 수술까지 받느라 입원이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담석증이라는 같은 증상에 대한 내과와 외과의 접근방식의 차이 같은 것을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내과의들은 매우 친절하다. 그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묻는 편이고, 매우 자주 나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한다. 검사도 진짜 여러번 한다. 간단한 피검사부터 엑스레이며 CT며...반면에 외과의는 교수뿐 아니라 레지던트, 인턴 조차도 정말 바람처럼 휙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며, 수술을 받은 후엔 내 상처나 몸을 쳐다봐 주지도 않아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상처부위의 드레싱 한번도 안해주고 퇴원시키더라. 퇴원 후 하루 이틀 뒤쯤 동네 일반외과에 가서 하면 된다면서. 물론 기초적인 내 바이탈 사인이 정상적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시술' 수준인 내시경 한번을 받으려고 시술 전날에 수차례 검사를 하고, 시술 다음날에 다시 그 검사를 거의 재탕으로 다 하는 내과와 비교하면 너무 낯설었다. 나는 수술한 다음 날 '근데 수술이 잘 되었는지 무슨 검사같은 건 안 해요?'라고 담당의에게 물었다가 '네? 무슨 검사를 또 하라구요?'라는 대답을 듣고 한참 무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왜 외과의들이 저런 태도를 취할까를 생각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런 유추가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우리같은 '글쟁이'들은 논문 한편, 아니 이런 블로그에 낙서 한 바닥만 해도, 제가 쓴 글을 보고 또 보며 고칠 데 없나 확인한다. 더이상 고칠 수 없는 마감 때까지 어딘가에는 실수나 오탈자가 있을 것 같아 쉽게 자기 글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근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몸에 구멍을 내서, 웬만한 사람은 다 가지고 있는 장기 하나를 떼어 버렸는데, 그 과정에 뭔가 실수나 이상이 있지 않을까를 저렇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 대목에서 떠오른 것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수많은 의학드라마들이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의 주인공은 외과의이다. 흉부외과이건 신경외과이건 소화기외과이건 간에, '메스! 썩션!'따위를 외치며 피를 보여주고 꿈틀대는 장기들을 만져대는 외과의들의 역동적이고 '예술적'인 수술과정이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상정하는 의학의 '본령'(?)이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보며 의학의 힘을 경외시하곤 해왔다. 반면에 내과의는 보통 여성 인물들이 맡으며, 그들의 역할은 외과의에 비해 부수적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보살핌'의 '포즈'는 경외시할 대상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미국드라마 <하우스>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그려져 왔던 내과와 외과 사이의 이러한 '계급'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하우스>에서 외과는 내과의인 하우스와 그의 팀원들이 밝혀 낸 환자의 병을 수술로 고쳐주기만 하면(?) 되는 '따까리' 신세가 된다. 병명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자로부터 병인을 진단해 내는 것은 모조리 내과의, 하우스의 몫이다.

 이처럼 <하우스>는  의학, 하면 외과를 떠올리게 하던 기존의 의학드라마들의 공식을 보란듯이 깨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럼 왜 그동안의 의학드라마들은 굳이 외과만을 다루어왔을까? 실제로는 3D과로 취급되어 외과 전공의의 숫자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같은 현실에서. 그 이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비주얼'일 것이다. 수술을 해야 드라마에 장면이 살아난다. 그렇다고 성기 등을 노출해야 하는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수술을 다루긴 어렵겠고, '메스-썩션'의 메아리가 리듬감있게 울려퍼지며 꿈틀대는 심장, 시뻘건 장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줘'가며 뭔가 제대로 인간의 몸을 고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로는 외과만한 진료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외과 드라마들이 어려운 의학용어를 쏼라쏼라해도 보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드라마들이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뭔 말인지 못알아 들어도 수술 장면을 보면서 그 긴박한 상황과 수술의 극적 성공이나 실패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의학드라마들은 아마도 외과 쪽의 이야기를 다룰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하얀거탑>처럼 간담췌의 권위자라거나 <카인과 아벨>처럼 뇌신경외과 전문의라거나...좀더 외과 내부의 세부전공을 다루긴 하더라도 외과를 벗어나는 것은 시각매체인 드라마나 영화로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나를 수술한 외과의들이 보였던 '자신감'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내 몸을 직접 보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문제가 있는 장기를 말끔히 떼어냈으니, 더 이상 궁금할 게 없는 것. 내과의들처럼 직접 보지 않고 여러 검사결과를 가지고 추정을 해야하는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직접 보여 줄 것이 별로 없는 내과를 중심에 두고 다루었으니, <하우스>는 나름 의학드라마로서는 새로울 뿐 아니라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 셈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하우스>는 '마니아' 층을 만들 수는 있어도 대중적 인기를 끌기는 어려운 드라마이다. 너무 말이 많고, 그들의 끊임없는 의학적 토론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반 이상은 이해도 안된다. 그럼에도 미드팬들이나 미국의 시청자들이 <하우스>를 즐겨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사생활의 엿보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우스>의 중심 이야기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한 사람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병원에 실려온다. 환자는 일부러이건, 혹은 혼수 상태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어서건 간에 자신이 이러한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환자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하우스 박사의 팀은 새롭게 드러나는 증상들에 따라 그때 그때 새로운 처치방법을 택하지만, 처음엔 쉽게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몇몇의 증세를 단서로 해서, 그리고 그 환자의 사생활(가족, 거주환경, 생활패턴, 성격, 과거의 병력, 가족력 등)을 파악하게 되면서 환자의 병명과 병인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에 따라 처치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병을 회복한 환자는 목숨을 구제받은 대가로 자신의 감춰뒀던 사생활, 비밀을 고해성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분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알아듣지도 못할 의학용어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가며 <하우스>를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9살짜리 비만의 꼬마 여자아이가 병원에 심장마비로 실려 들어오자 그 아이가 어린아이가  엄마 몰래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거나, 어떤 대통령 후보가 어렸을 적 간질을 앓았고 그때문에 간질 치료제를 먹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만든다거나, 젊은 청년이 부모님 몰래 제3세계국가에 여행을 갔다가 성병에 걸려온다거나...하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그들의 몸과 증세를 통해 파헤쳐 까발기는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뭔 수치가 무슨 호르몬의 이상으로 높아졌는지, 거기에 뭐뭐 약을 쓰면 증세가 호전되는데 대신에 무슨 부작용이 있는지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못알아 들어도 상관이 없다.

 외과가 중심이 되는 대부분의 의학드라마는, 병에 걸린 환자가 '왜?' 그 병에 걸렸는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아니, 외과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병자가 어떠한 생활, 식습관, 복용력 등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다. 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 것이 그의 어떤 생활습관때문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이 위암에 걸렸다고, 그가 짜게 먹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뭐뭐뭐 약을 장기 복용해서 위암에 걸렸다...식의 말을 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병에 걸리게 된 그 사람의 '과거'는 보통 드라마에서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냥 병에 걸린 것, 그래서 그 이후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 자체만이 중요하다. 외과의들은 그런 병을 수술로서 치료해주는 것이고.

 그런데 <하우스>의 의사들은 '어떻게 병을 치료할 것인가?'의 답을 보통의 의학드라마들이 하는 방식의, 'A증상에는 A~의 치료법을'과 같은 병-치료(수술)법의 대응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A증세는 a라는 원인때문이다'라는 병의 원인-병의 대응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병의 치료법은 증세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통해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원인을 찾기 위해 병자의 '뒷조사'를 열심히 해댄다. 시청자들은 이 뒷조사가 재미있어서 이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다.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을 오갈때 나를 보던 사람들의 '젊은 처자가 어쩌다, 뭔 병에 걸려서?'하는 동정과 동시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처럼.

 어쨌든, 병, 증상의 원인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으며, 몸의 모든 부위는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하우스>는 독특하고 또 의미있는 의학드라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우스>의 서사는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죄의식이나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하다. 원인을 열심히 캐고, 그 원인들이 대부분 환자 본인의 사생활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때문에 환자들은 자신이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이런 병에 걸렸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과의와 외과의 앞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하우스> 때문이었다. 외과의 앞에서의 나는 거의 아무 것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과의 앞에서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참 쓸데없이) 솔직했다. 나의 생활습관이나 약물복용의 경험 등에 대해서 너무 열심히 털어놨다. 그러지 않으면 <하우스>에 등장하던 수많은 환자들처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을 보이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단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겪은 병원과 의사, 의학이란 <하우스>같은 정도의 내 뒷조사를 요구하진 않았다. 내가 40대 이상의 비만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는 담석증에 걸린 이유를 알기 위해 실컷 내 사생활(?)을 얘기했지만 원인 규명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나의 담당 내과의는 '원인은 정확하게 모릅니다. 뭐 그게 약간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죠' 식의 애매한 답변 뿐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담당의가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그게 실제 현재의 의학의 수준이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하우스>처럼 병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히고 단정적으로 그 병에 대해 진단해 내는 일은 현실에선 아직 쉽지 않은(어쩌면 위험한기도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몸을 통해 한 인간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시청자들을 매혹하기 위한 과도한 설정일 뿐. 인체는 여전히 신비롭고 너무나 복잡하며, 현실 속의 의사들은 대체로 이 인간의 몸 앞에 겸손하다. 당신이 어떤 '짓'을 하고 살아서 그런 병에 걸린 거라며 비난(?)하는 일은, '독설가 닥터 하우스'가 드라마 속에서나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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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온라인글쓰기, 운전만큼 위험한가?

2009/05/13 16:50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구글이 유튜브의 게시 기능을 없애면서까지 실명제 적용을 거부하였다. ‘익명성이 웹의 정신’이라는 말은 틀렸다. 많은 카페나 웹사이트들이 이용자들 사이의 자발적인 약속에 따라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에 확대실시된 실명제는 강제적이라서 문제이다.

국민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국가에게 공개하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형법 215조와 같은 “범죄수사에의 필요성”과 같은 특별한 공익이 있는 경우에만 사생활 및 사적인 정보의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 신원 공개도 마찬가지다. 불심검문은 경찰관직무집행법 제3조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떳떳하면 왜 실명 등록을 못하는가’라고 다그치는 실명제 찬성자들도 길거리를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신원 공개를 요구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불쾌해할 것이다. 인터넷실명제 반대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기통신사업법 54조에 따라 포털들이 모든 게시글에 붙어 있는 실명을 영장도 없이, 게시자에 대한 고지도 없이 수사기관들에 넘겨주고 있어, 실명이 스크린에 떠 있지만 않을 뿐 글쓰기를 할 때마다 실명을 국가에 등록하는 ‘순수 실명제’라고 봐야 한다.

물론 강제적 실명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부동산실명제와 금융실명제는 사기 및 탈세의 위험성 때문이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달도록 하는 것은 자동차의 파괴성과 이동성 때문이다. 청소년 유해물을 보는 사람에게 성인 인증을 위해 주민번호를 강제하는 것도 이를 청소년이 보았을 때의 유해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자동차 운전, 금융거래처럼 위험한 행위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익명의 글쓰기는 도리어 사상의 전파라는 공익적 구실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위험’이 있더라도 보호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정권 시절 탄압을 피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한 수많은 익명의 글들을 보라. <폭풍의 언덕>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여성 작가들에 대한 편견을 피하기 위해 ‘Acton Bell’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시대의 편견과 권력의 탄압을 피하여 자유로운 비평과 예술활동을 한 필명 사용자들은 ‘몰리에르’, ‘볼테르’, ‘졸라’, ‘트로츠키’, ‘조지 오웰’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사드 백작, ‘오 헨리’, ‘조르주 상드’, 심지어는 아이작 뉴턴도 있다.

온라인 글쓰기라고 다를까? 온라인의 글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 볼 수 있거나 퍼 나를 수 있지만, 이것은 게시자의 통제 밖의 일이며 방송과 달리 독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독자의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하여 실명 등록의 부담을 지우는 것은 어떤 장르의 책이 잘 팔린다고 해서 갑자기 그 장르의 저자들은 모두 실명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다.

인터넷 실명제 아래서는 불법 게시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어차피 의도적으로 불법 게시물을 올릴 사람들은 자신의 실명과 번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불법 게시물을 올리는 자들은 어차피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합법적인 게시물을 쓰려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감시를 받기 싫어서이다. 자제의 미덕이 아니라 강제된 위축이다. 자발적인 실명제 사이트에서 명예훼손이 적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길거리 범죄를 막겠답시고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에게 명찰과 주민번호를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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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2009/05/13 16:46 | Posted by <소문> 편집실

<비상> 100 분 | 개봉 2006.12.14

감독 임유철 

우연히 <비상(飛霜)>과 <레알(Real)>이라는 축구 영화를 잇달아 보았다.

뒤늦게 본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은 최고의 축구 영화이자 스포츠영화였다.

(반면 <레알>은 최악이었다. 언급을 회피하고 싶다. <비상>을 보면 돈으로 선수를 박박 채집하여 긁어모으는 레알마드리드 같은 구단이야말로 ‘지구방위대’는커녕 지구를 망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좀더 선명하게 알게 된다. <비상>의 주인공인 인천Utd.는 흥미롭게도 ‘시민’ 구단이다.)

 

이 다큐 영화는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스포츠영화의 서사구조를 따른다.

무명과 소외로부터 마음과 몸을 다 다쳐 이제는 별로 물러설 데가 없는,

‘찌질한’ 선수들(영화에 직접 나오는 표현으로는 ‘쓰레기’)로 이뤄진 팀이

신념에 찬 멋진 감독을 만나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는.

 

그런데 이는 인천Utd.라는 신생 팀이 05년 K리그에서 해낸 ‘실제’ 사건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

05년의 챔피언결정전에서 결국 최강팀 울산에게 6-3(홈엔어웨이 합계)으로 패배했을 때,

덩치 큰 ‘선수’들은 마구 눈물을 쏟는다. 서포터스도 눈물을 흘린다.

영화 관객들 중에도 함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지만, 절대적인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축구라는 남성 문화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

이를테면 거기에 걸려 있는 존재들의 내면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축구 영화로서도 상당히 귀하다.(<천리마축구단> 같은 영화도 기념비적인 축구영화지만, 찾아보면 보석 같은 축구영화들이 더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프로스포츠에서 승리와 패배의 의미, 수없이 많은 무명 선수들의 운명, 라커룸에서 일어나는 일, ‘이주노동자’로서의 용병과의 관계 등 현대 프로스포츠에서의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인천은 파란을 일으켰던 06년 이후 그렇게 뛰어난 성적을 얻지는 못했다. ‘기적’은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겠다. 장외룡 감독은 현재 일본 오미야 아르디쟈의 감독이다. 몬테네그로 국적의 용병 라돈치치는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성남 일화로 이적했고, 임중용은 여전히 주장으로서 인천에서 뛰고 있다. 그는 이제 34세의 할아버지급 선수이다.

 

참고)

http://blog.naver.com/bisangsoccer 비상 공식 블로그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C%B2%9C_%EC%9C%A0%EB%82%98%EC%9D%B4%ED%8B%B0%EB%93%9C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0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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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 메모 : <오스카 와오의 짧고도 놀라운 인생>

2009/05/13 16:37 | Posted by <소문> 편집실

<고래>의 작가가 근래 읽은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됐는데, 과연 <고래>에 필적할 만했고 그 작가가 좋아할만했다. 2007년 미국은 도미니카 역사와 ‘현대의-판타지’를 가득 담은 이 소설에 퓰리처상을 비롯한 거의 모든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여했다. 작품은 한국에서도 목하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모양이다. 이런 문학은 사랑할만하다. 여전히 ‘문학의 힘’ 같은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번역소설인데도 소설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즐겁게’ 읽힌다.

> 문학적 글로벌리즘 : 오스카의 면모가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듯, 문화적 글로벌리즘 위에 이 소설의 서사가 펼쳐져 있어 놀랍다. 오스카는 중남미 ‘지역’ 고유의 문제(미국과의 투쟁, 인종 문제, 중남미 나라끼리의 독특한 관계)를 담지한 ‘민족’(도미니카)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제1세계)의 온갖 현대적 대중문화와 문학(특히 SF를 필두로 한 장르소설!) 및 또한 일본 문화(아니메와 오타쿠 등)가 만들어낸 세계적이며 현대적인 인간이다.

 

도미니카는 (우리에게는 거의 비가시적일만큼) 불가해한 인종적-문화적 특수성을 가진 고유의 실체인 듯하지만, 기실 이미 그 속에서의 삶은 현대와 자본주의,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 속에 있다. (아마도 ‘근대’는 그 이전부터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신세계’가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그것이 세계문학 및 세계대중문화의 최초의 성립 요건이기도 하다.)

오타쿠이며 숫총각인, 장르와 게임 마니아이자 ‘뚱땡이’인 젊은 남자들은 목하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지 않은가? (오히려 가장 다른 것은 원래적인 도미니칸과 한국인들이다.)이런 존재를 통해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아래로부터’(?) 구현된다.

 

> 비유와 문체 : ‘언어적-예술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신랄하고 유머러스하고, 세계에 대한 통찰을 담은 문장이다. 한국말로도 잘 옮겨진 이 문장은 우리가 말하는 좋은 의미의 ‘구라빨’(세계와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권력에 대한 지극히 풍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내 주변에서 이런 식의 문장 구사력을 가진 이는 딱 두 사람인데, <고래>의 작가와 <현대사 인물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쓴 작가이다. 전자는 새 장편소설 출간을 앞두고 분투중이라 하고, 후자는 근자에 생계와 프로야구 때문에 글을 잘 못 쓰고 있다.

  (그외 :
* 문체/비유의 글로벌리즘 : ‘백만 년만에 만난’ 등의.

* 오늘날 한국소설의 문체 : <완득이> 식 문체가 한동안 유행할 듯. 이 문장체는 과연 미덕이 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갈까?)  


 

  > 모든 위대하고 중요한 문학이 그러하듯, ‘역사’로부터 <오스카>의 서사는 왔다. 다시 말하면, 시간(역사)에 관한 사유가 이 소설의 스케일이다. <고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 등도 그랬듯, 역사에 관한 가장 독특한 방식의 해석과 전유가 소설의 특징이다. 이 소설에 있어 그것은 중남미사+도미니카사이다. 그것은 한편에는 중남미식 군사독재(소설의 허두에 ‘푸쿠’라 칭해지는)와 CIA의 음모,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쿠바혁명과 체게바라와 고난에 찬 민중의 삶이 대칭을 이뤄온 그 역사이다. 또한 그것은 ‘미국으로의-디아스포라’사(史)이다.


‘미국으로의’ 디아스포라는 19세기 이래, 미국을 꼭지점으로 한 세계적 모순과 그에 입각한 문화적-상상력의 원천 그 자체이다. 이탈리아계는 <대부> 시리즈와 마피아를, 유태인과 아일랜드계는 미국의 지배력 자체(의 일부)를, 중국계는 미국의 아시아 표상과 차이나타운으로 요약되는 온갖 것을, 일본계는 재패니메이션과 자동차를... 아마도 이 소설은 지금 당장의 미국에게 중요했으리라. 다양한 라티노들이 미국의 ‘하부’를 잠식하게 됐으니까.


글로벌-하이퍼-모더니티는 물론 ‘미국’을 무대로 하여 ‘영어’로 씌어진 것에 의해 펼쳐짐으로써 완수된다.(<고래>가 <오스카 와오>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하기는 <고래>도 작년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이는 또다른 ‘제3세계’ 소재의 작품인 <슬럼 독 밀리어네어>의 경우와 비교할만하다. 인도의 뭄바이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고 영국 감독이 만든(영어와 인도어가 반씩 나오는) 이 작품의 젊은 주인공은 또 다른 오스카이다. ‘퀴즈쇼’의 패자(覇者)가 되는 그는, 제3세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자라난, 비참한 ‘운명’(카스트의 질서나 ‘세계사적’ ‘빈곤’이 한 명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운명)의 담지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현업’은 휴대폰 회사 텔레마케터이다. 그는 텔레마케팅용 컴으로 형과 연인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찾아낸다.

이 작품도 ‘아카데미’를 비롯해서 영화상을 다 휩쓸었다. 오바마 전후(前後)의 미국, 또는 ‘부시 이후’의 미국의 문화담당자들은 제3세계와 ‘유색인’들에 대해 뭔가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 제3세계인들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 미국에서 성공한 도미니칸의 상징일 A.로드.
야구는 이번 WBC에서 잘 나타난것처럼
미국을 중심(정점)으로 한
환태평양+카리비안 대중문화의
중대한 매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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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대해 연인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근데 변하더라."라는 답을 듣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의 '로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너뿐이야', '사랑해서 결혼했다'와 같은 말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연식'이 오래된 인간일 수록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이며, 무책임한 말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가족애' 등으로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좀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영구성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 <시간>(김기덕, 2006)에서는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포하게 되는 권태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육체를 바꾸는(성형수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려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엘레지>(이자벨 코이셋, 2009)에서는

사랑의 비영구성을 냉소하면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 시간과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그 사랑의 소멸,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동인이 육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어쩌면 지나치게)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적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시간>의 새희(성현하 분)와 <엘레지>의 데이빗(벤 킹슬리 분)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랑을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리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이지만 허구적인 모토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매우 영리하고 현실직시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이 늙고 병들고 추해졌을 때에도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플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라는

결혼식 주례사는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현명함은 한편으론 유아적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시간을 통해 변하고 퇴색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언젠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넌 결국 날 떠나게 될거야'라며 한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선수쳐서 떠나보내기'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이 겪을 상처보다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자기방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안한가에 대해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은 사실 사랑의 다른 모습이거나 그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불안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퇴색시켜 버린다.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지는가?

냉소만으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버려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이별하게 될 때 자신이 겪게 될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그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감정은 강렬한 실재이다.

 

새희와 데이빗은 헤어졌던 연인들과 다시 만난다.

너무 오래 만나 자신의 몸이 지겨워져서 떠날 거라 생각했던 새희는

완전히 바뀐 새로운 육체로 지우(하정우 분)를 유혹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열 다섯살이나 젊어, 결국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떠나버릴 거라 예상했던 데이빗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병든 육체와 다시 대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회'는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영원한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치한(?) 수준의 영화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지나친 자기방어 덕에 다시 시작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래 버렸다.

새희는 과연 지우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성형 수술 전의 새희인가, 성형 수술 후의 새희인가?

데이빗은 과연,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도 콘수엘라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들의 불안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시간>은 지우가 과거의 새희를 잊지 못하자, 새희는 자신의 과거 육체에 대해 질투를 느껴야만 하게 되고,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모두 새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우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바꾼 뒤 우연한 사고로 급사하는 결말을 그린다.

그녀의, 시간을 통해 변질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대상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전신성형으로 이제 지우인지도 불분명한, 그러나 지우인 것 같은 주검 앞에서

새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완전히 다른 육체가 된 연인에게,

이전보다 아름답고 젊은 육체가 되었건, 싸늘한 시신으로 마주하게 되었건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이 가능한가?

 

영화<시간>은 이처럼 사랑과 시간과 변화와 육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비현실적일만큼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날카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편  <엘레지>는 이러한 불안을 영화에서 더이상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을 통해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한 듯 하다.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성과 사귀어보았고,  

콘수엘라에 매혹된 자신의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특히 그녀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데이빗은

겨우 5명의 남성을 사귀어 보았다는 콘수엘라의 과거(?)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혼자 쿨한 척은 다하고 콘수엘라를 만나는 동안에도 오랜 섹스파트너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콘수엘라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날까봐 의심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경륜을 근거로

콘수엘라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데이빗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는 콘수엘라이다.

데이빗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심과 집착의 태도와

그러는 한편 종종 보여주는 '너는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젊고 멋진 남자에게 가게 될거야'라는 말 사이에서

콘수엘라는 그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장난감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진 않지만 감정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

언젠간 자신도 가지고 놀다 버릴 것이면서도 빼앗기긴 싫어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는 것.

 

데이빗은 자신의 콘수엘라에 대한 집착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도 포기한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사랑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수엘라가 그녀의 졸업 축하 가족파티에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요?"라는 콘수엘라의 원망에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래 다 끝났다. 진작에 이렇게 될줄 알았다'며 체념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사랑은 잊혀질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2년이 넘도록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다 2년 뒤 그녀에게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신에게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메시지에

새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할 말'이란 그녀의 결혼 소식쯤이 될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콘수엘라는 '당신은 늘 내가 너무 젊다고 했는데...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데이빗은 자신의 그동안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뒤늦게 콘수엘라에게 다가가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는 콘수엘라의 암 진행 정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도

그녀가 죽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술 뒤 병들고 지친 콘수엘라의 육체 앞에 나타난 데이빗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병상에 자신의 몸을 비스듬히 뉘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녀 옆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투병생활이 참혹하거나 지리해지면서

데이빗은 차츰 그녀로부터 떠나게 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가 죽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운 좋게 그녀가 완치되어 정말 데이빗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데이빗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었다는 것.

육체의 노화나 소멸은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짐작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감정 역시 경험이나 통계만으로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나친 허위의식 속에 지금의 사랑을 신성시 하거나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지적 통찰력을 믿고 온전히 'fall-in-love'하지 못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쯤해서 <엘레지>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병 앞에서 사랑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좀 더 '고수'들을 직접 보여주는 드라마가 하나 떠오른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의 훌륭함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고복수(양동근 분)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도

전경(이나영 분)과 복수는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곧 죽을 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은 뒤에 장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경은 용감하게 계속 사랑한다.

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경을 만나고,

경은 복수의 병을 알고 난 뒤에 복수에게 청혼을 한다.

물론 복수는 결혼을 하자는 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아예 소멸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까지는 포기하지 못했어도 결혼까지 할 엄두는 못내는 것이다.

 

그때 경이 말한다.

"우리, 살아있을 때 살고, 죽었을 때 죽어요. 살아있을 때 죽지 말고, 죽었을 때 살지 말아요."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이며 쉽지 않은 말인가.

 

몸의 변화와 소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까지도 변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자세는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명분 하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쿨함'의 가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재의 감정과, 그 속에 배태된 불안까지 껴안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그러했기 때문에 헤어지게 될 때에는 후회나 미련 한 방울 남기지 않으며  헤어질 수 있는 것.

 

헤어질 때를 걱정하며 사랑하고, 사랑했을 때에 대해 회한을 남기며 헤어지는 것은

똑똑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자들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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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할배(사람) : 워낭소리

2009/05/07 01:49 | Posted by <소문> 편집실

할배와 소의 모습과 그 (일치된) 삶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소재를 굳이 찾아냈다는 것도 훌륭한 ‘기획’임에 틀림없었다.

(감독은 사전에 각지의 농협을 돌며 '죽어가는 소'를 수소문했단다.)

그러나, 어떤 소녀ㆍ청년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전혀 내 경우는 아니었다.

물론 죽은 소가 포크레인이 판 구덩이에서 포크레인이 뿌리는 흙으로,

그의 몸과 똑같은 색깔의 흙과 하나가 되는 장면은 훌륭했다.


또한 이 다큐에는 '노화'와 죽음에 관한 하나의 진지한 관찰과 묘사가 있다.

그것은 특별하게도 소의 죽음이다. 소는 대상이며 동물이며 주체이다.

그러나 소라서 돼지나 개, 쥐와 조금 다르다.

소는 확연히 ‘얼굴’을 가진 동물이다. (돼지, 개, 쥐들도 '때로' 얼굴을 갖고 있다.)
주로 눈 때문에 그렇다.

소의 죽음을 길게 묘사했다. 소는 천천히 죽는다.

이 천천히-죽음에 관한 기록을 우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죽는 소의 얼굴도 ‘임종’하는 인간의 얼굴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소는 왠지 이름이 없다. 할배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 또는 영화가 빠뜨린 것?)

 

그러나 만약 영화가 '할배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되거나 ‘히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이유들 때문에, 감동은 방해받았고, 중간에 약간 졸았다.

 

0) 인간의 소-됨은 존경스러운 것이었으나,

소의 소-됨은 눈으로 보기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이는 나의 위선일 수 있겠으나,  소의 소-됨에 대해서

할배는 과연 인간다운 '잔인함'과 '컴패션'을 동시에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배는 자신의 '소-됨'은 온전히 인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1) 갈등구조가 단순하다. 할매의 푸념과 비판은 그런 점에서 양가적이다.

할매는 ‘현실’을 일깨우며 문제의 모든 측면을 잘 제시한다.

할배의 삶에 대한 동일시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갈등을 단순화시킨다.

(할매의 마음 전체가 '농민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삼자의 관계를 ‘삼각관계’라 표현했다.)


2) 영화는 예정된 결론으로 서사를 몰아가고 있었다.

감동과 해석을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삽입된 컷들은 좀 '아름다워서' 수가 ‘얕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소들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은 가장 어색한 것이 아닐까?

'소는 인간이 아니다'(소는 죽어서야 업에서 벗어난다... 등)는 복잡한 진실을 이 자막은 왜곡한다.


3) 뒤늦게, 스토리를 알고 봤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러닝타임은 짧다.


4) 몇몇 평들이 영화를 보는 과정에 떠올랐다.

특히 관객이 무엇을 영화를 통해 보았을까,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강기갑의 말(‘영화가 농민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 진짜루?)도 떠오른다... zzz. 

도시민들이 저 영화를 통해 무엇을 소비했는가, 하는 논평이 상기되고 

농업과 흙이란 과연 우리에게 오늘날 무엇인가...... 하는 잘 모르는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졸았다. zzz...

5) 자꾸 경북 봉화 사투리(맞나?)의 어미가 귀에 들리고, 자막이 보인다.

할매는 그 동네에서만 쓰는 ‘-니껴’를 완연히 많이 쓰고

할배는 표준말의 어미와 동일한 ‘-요’도 많이 쓴다.

헌데 이 영화의 자막은 발음대로 인물의 대사를 옮기지 않은,

이상한 직역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사람들을 위해서? (만약 '실제'라면, 저 경상도 할배의 말을 그들은 몇%나 직해할까?)

자막이 없었다면 나도 대사를 많이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번역 자막에는 '폭력'적인 경우도 있었다.

 

6) 이O박이도 봤단다.

왜 쥐는 사람의 양식을 쏠아대는 자기의 일에 몰두하지 않고

소와 사람에 관한 스토리에 관심을 갖나? 그것은 토론거리임에 분명하다.

쥐가 '그 할배는 어떻게 됐나?' 따위를 묻지 않고

'관객이 얼마나 들었나?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나?'

를 물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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