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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석증때문에 보름 전쯤 담낭적출술을 받았다. 나름 전신마취도 하고 하는 '진짜' 수술이었지만 요즘의 의학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3박4일이면 퇴원할 수 있는 병이었는데, 나는 좀 특이한 상황때문에 9일만에 퇴원을 하게됐다. 이 특이한 상황이란  처음의 나를 담당한 진료과목이 '내과'였다가, '외과'로 트랜스퍼되었던 것. 처음엔 췌담관 내시경 조영술을 하면서 담도나 담낭에 있을 지 모르는 돌들을 찾아내고, 돌이 발견되면 그것을 제거하는 간단한 내과적 '시술'로 끝날 줄 알고 학기중에 겁없이 입원을 했었다. 그런데 내시경을 넣어 막상 몸 안을 보니, 담낭(쓸개)쪽에 돌이 너무 많아서 외과적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래서 그 수술까지 받느라 입원이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담석증이라는 같은 증상에 대한 내과와 외과의 접근방식의 차이 같은 것을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내과의들은 매우 친절하다. 그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묻는 편이고, 매우 자주 나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한다. 검사도 진짜 여러번 한다. 간단한 피검사부터 엑스레이며 CT며...반면에 외과의는 교수뿐 아니라 레지던트, 인턴 조차도 정말 바람처럼 휙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며, 수술을 받은 후엔 내 상처나 몸을 쳐다봐 주지도 않아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상처부위의 드레싱 한번도 안해주고 퇴원시키더라. 퇴원 후 하루 이틀 뒤쯤 동네 일반외과에 가서 하면 된다면서. 물론 기초적인 내 바이탈 사인이 정상적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시술' 수준인 내시경 한번을 받으려고 시술 전날에 수차례 검사를 하고, 시술 다음날에 다시 그 검사를 거의 재탕으로 다 하는 내과와 비교하면 너무 낯설었다. 나는 수술한 다음 날 '근데 수술이 잘 되었는지 무슨 검사같은 건 안 해요?'라고 담당의에게 물었다가 '네? 무슨 검사를 또 하라구요?'라는 대답을 듣고 한참 무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왜 외과의들이 저런 태도를 취할까를 생각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런 유추가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우리같은 '글쟁이'들은 논문 한편, 아니 이런 블로그에 낙서 한 바닥만 해도, 제가 쓴 글을 보고 또 보며 고칠 데 없나 확인한다. 더이상 고칠 수 없는 마감 때까지 어딘가에는 실수나 오탈자가 있을 것 같아 쉽게 자기 글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근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몸에 구멍을 내서, 웬만한 사람은 다 가지고 있는 장기 하나를 떼어 버렸는데, 그 과정에 뭔가 실수나 이상이 있지 않을까를 저렇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 대목에서 떠오른 것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수많은 의학드라마들이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의 주인공은 외과의이다. 흉부외과이건 신경외과이건 소화기외과이건 간에, '메스! 썩션!'따위를 외치며 피를 보여주고 꿈틀대는 장기들을 만져대는 외과의들의 역동적이고 '예술적'인 수술과정이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상정하는 의학의 '본령'(?)이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보며 의학의 힘을 경외시하곤 해왔다. 반면에 내과의는 보통 여성 인물들이 맡으며, 그들의 역할은 외과의에 비해 부수적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보살핌'의 '포즈'는 경외시할 대상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미국드라마 <하우스>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그려져 왔던 내과와 외과 사이의 이러한 '계급'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하우스>에서 외과는 내과의인 하우스와 그의 팀원들이 밝혀 낸 환자의 병을 수술로 고쳐주기만 하면(?) 되는 '따까리' 신세가 된다. 병명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자로부터 병인을 진단해 내는 것은 모조리 내과의, 하우스의 몫이다.

 이처럼 <하우스>는  의학, 하면 외과를 떠올리게 하던 기존의 의학드라마들의 공식을 보란듯이 깨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럼 왜 그동안의 의학드라마들은 굳이 외과만을 다루어왔을까? 실제로는 3D과로 취급되어 외과 전공의의 숫자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같은 현실에서. 그 이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비주얼'일 것이다. 수술을 해야 드라마에 장면이 살아난다. 그렇다고 성기 등을 노출해야 하는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수술을 다루긴 어렵겠고, '메스-썩션'의 메아리가 리듬감있게 울려퍼지며 꿈틀대는 심장, 시뻘건 장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줘'가며 뭔가 제대로 인간의 몸을 고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로는 외과만한 진료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외과 드라마들이 어려운 의학용어를 쏼라쏼라해도 보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드라마들이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뭔 말인지 못알아 들어도 수술 장면을 보면서 그 긴박한 상황과 수술의 극적 성공이나 실패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의학드라마들은 아마도 외과 쪽의 이야기를 다룰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하얀거탑>처럼 간담췌의 권위자라거나 <카인과 아벨>처럼 뇌신경외과 전문의라거나...좀더 외과 내부의 세부전공을 다루긴 하더라도 외과를 벗어나는 것은 시각매체인 드라마나 영화로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나를 수술한 외과의들이 보였던 '자신감'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내 몸을 직접 보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문제가 있는 장기를 말끔히 떼어냈으니, 더 이상 궁금할 게 없는 것. 내과의들처럼 직접 보지 않고 여러 검사결과를 가지고 추정을 해야하는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직접 보여 줄 것이 별로 없는 내과를 중심에 두고 다루었으니, <하우스>는 나름 의학드라마로서는 새로울 뿐 아니라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 셈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하우스>는 '마니아' 층을 만들 수는 있어도 대중적 인기를 끌기는 어려운 드라마이다. 너무 말이 많고, 그들의 끊임없는 의학적 토론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반 이상은 이해도 안된다. 그럼에도 미드팬들이나 미국의 시청자들이 <하우스>를 즐겨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사생활의 엿보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우스>의 중심 이야기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한 사람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병원에 실려온다. 환자는 일부러이건, 혹은 혼수 상태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어서건 간에 자신이 이러한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환자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하우스 박사의 팀은 새롭게 드러나는 증상들에 따라 그때 그때 새로운 처치방법을 택하지만, 처음엔 쉽게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몇몇의 증세를 단서로 해서, 그리고 그 환자의 사생활(가족, 거주환경, 생활패턴, 성격, 과거의 병력, 가족력 등)을 파악하게 되면서 환자의 병명과 병인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에 따라 처치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병을 회복한 환자는 목숨을 구제받은 대가로 자신의 감춰뒀던 사생활, 비밀을 고해성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분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알아듣지도 못할 의학용어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가며 <하우스>를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9살짜리 비만의 꼬마 여자아이가 병원에 심장마비로 실려 들어오자 그 아이가 어린아이가  엄마 몰래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거나, 어떤 대통령 후보가 어렸을 적 간질을 앓았고 그때문에 간질 치료제를 먹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만든다거나, 젊은 청년이 부모님 몰래 제3세계국가에 여행을 갔다가 성병에 걸려온다거나...하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그들의 몸과 증세를 통해 파헤쳐 까발기는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뭔 수치가 무슨 호르몬의 이상으로 높아졌는지, 거기에 뭐뭐 약을 쓰면 증세가 호전되는데 대신에 무슨 부작용이 있는지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못알아 들어도 상관이 없다.

 외과가 중심이 되는 대부분의 의학드라마는, 병에 걸린 환자가 '왜?' 그 병에 걸렸는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아니, 외과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병자가 어떠한 생활, 식습관, 복용력 등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다. 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 것이 그의 어떤 생활습관때문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이 위암에 걸렸다고, 그가 짜게 먹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뭐뭐뭐 약을 장기 복용해서 위암에 걸렸다...식의 말을 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병에 걸리게 된 그 사람의 '과거'는 보통 드라마에서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냥 병에 걸린 것, 그래서 그 이후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 자체만이 중요하다. 외과의들은 그런 병을 수술로서 치료해주는 것이고.

 그런데 <하우스>의 의사들은 '어떻게 병을 치료할 것인가?'의 답을 보통의 의학드라마들이 하는 방식의, 'A증상에는 A~의 치료법을'과 같은 병-치료(수술)법의 대응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A증세는 a라는 원인때문이다'라는 병의 원인-병의 대응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병의 치료법은 증세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통해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원인을 찾기 위해 병자의 '뒷조사'를 열심히 해댄다. 시청자들은 이 뒷조사가 재미있어서 이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다.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을 오갈때 나를 보던 사람들의 '젊은 처자가 어쩌다, 뭔 병에 걸려서?'하는 동정과 동시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처럼.

 어쨌든, 병, 증상의 원인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으며, 몸의 모든 부위는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하우스>는 독특하고 또 의미있는 의학드라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우스>의 서사는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죄의식이나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하다. 원인을 열심히 캐고, 그 원인들이 대부분 환자 본인의 사생활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때문에 환자들은 자신이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이런 병에 걸렸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과의와 외과의 앞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하우스> 때문이었다. 외과의 앞에서의 나는 거의 아무 것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과의 앞에서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참 쓸데없이) 솔직했다. 나의 생활습관이나 약물복용의 경험 등에 대해서 너무 열심히 털어놨다. 그러지 않으면 <하우스>에 등장하던 수많은 환자들처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을 보이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단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겪은 병원과 의사, 의학이란 <하우스>같은 정도의 내 뒷조사를 요구하진 않았다. 내가 40대 이상의 비만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는 담석증에 걸린 이유를 알기 위해 실컷 내 사생활(?)을 얘기했지만 원인 규명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나의 담당 내과의는 '원인은 정확하게 모릅니다. 뭐 그게 약간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죠' 식의 애매한 답변 뿐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담당의가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그게 실제 현재의 의학의 수준이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하우스>처럼 병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히고 단정적으로 그 병에 대해 진단해 내는 일은 현실에선 아직 쉽지 않은(어쩌면 위험한기도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몸을 통해 한 인간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시청자들을 매혹하기 위한 과도한 설정일 뿐. 인체는 여전히 신비롭고 너무나 복잡하며, 현실 속의 의사들은 대체로 이 인간의 몸 앞에 겸손하다. 당신이 어떤 '짓'을 하고 살아서 그런 병에 걸린 거라며 비난(?)하는 일은, '독설가 닥터 하우스'가 드라마 속에서나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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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해 남짓 살아오면서 생물, 화학엔 전혀 관심도 재능도 보이지 못했다. 노란 싹수와도 같은 관심이 잠시 부끄럽게 고개를 내민 적도 있었으나 그 관심은 관심에 합당한 점수로 보상/응답되지 못했다. (호르몬의 체계는 아름다웠지만, 어느 호르몬의 부작용이 무엇인지는 외우는 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일방적인 짝사랑이거나, 번지수 잘못 찾은 사랑이 바로 순수과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니 이 알량한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 대학에 올라와서 과학탐구영역 한뭉치에 해당하는 과목을 듣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건 해방이었다. 과정이 가상해도 답이 틀리면 틀리고마는 과목과 거리가 먼, 썰을 풀 수 있는 과목을 전공으로 삼을 수 있어서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절대 정답이 있을 학문에 대한 목마름이 참 커졌다. 스도쿠를 하다가 수학을 잘 할 것이란 착각과도 같은 그런 심리일 것. 그럴 때 찾아온 것이 미국판 의학 드라마였다. 미국판 의학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병리학의 기초는 이해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무식한 인문대생에게 심어주는 놀라운 교육 효과를 갖고 있다. 특히 House는 하우스 선생님과 함께하는 CSI의 병원판이 아닐까 싶다. 척척박사 하우스 박사님과 함께하는 병리학 시간. 짜잔 오늘은 우리의 하우스 박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하우스 박사님께 바로 직행하기 전에 내가 사랑해왔던 미국 의학드라마의 맥을 따라가보자. (사실 열심히 본 게 ER, Grey's Anatomy, House이므로 요 세 가지 드라마만 이야기 할 것이다. General Hospital을 못 본 게 심히 안타까운.)

 
ER
(199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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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의 병아리 미드 팬에게 처음 찾아온 것은 ER이었다. ER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공중파를 탔던 것 같은데, 어렴풋이 보다 말다 했고, 굳이 TV에서 사람 죽는 응급실을 봐야겠냐는 아버지의 역정에 지레 겁먹고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후 다시 다른 경로로 ER을 시즌 4까지 보면서, 병리학은 몰라도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해야 하는 검사 용어인Chem 7, 삽관intubation이란 말을 알아듣는 나름 기특한 경지에 올라섰다. (호르몬 종류와 담당 기관도 못 외우는 주제에) 사실 ER은 13년이란 방영 햇수만큼이나 끈질긴 권위를 가진 의학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긴박한 스피드 (항상 ER의 상황은 응급실의 가장 급박한 순간을 포착한다! 응급실이 늘상 그렇게 일분 일초를 다투는 게 아닐 진대.)와 이글이글한 동료애와 이리저리 교차하는 연애 작대기로 가득 찬 공간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펼쳐보인 게 이 드라마가 아닐까. (사실 이 드라마와 함께 General Hospital의 장구한 역사와 수용자층, 그리고 결말도 이야기해봐야 겠는데, 워낙에 이 드라마엔 문외한인지라 잠시 스킵) ER의 배경이 되는 병원은 늘 부족한 재정과 의료진에 시달리고, 그곳에 근무하는 의사도 카터 말고는 부요한 사람이 없는 참으로 보기 드문 병원이다. 누군가는 숨기고 싶은 못난이 가족이나 밝히고 싶지 않은 재정적 어려움이 있고, 또 누군가는 갚아야 할 학비 융자금이 산적해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곧 무너질 것 같은 결혼생활을 간신히 지탱해 간다. 의사는 부자/곧 부자(would-be-rich)라는 90년대 한국의 일반상식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드라마였다. 아~의사도 저렇게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안겨준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들의 팍팍한 삶은 닥터 그린이 늘상 통근할 때 이용하는 시카고의 을씨년스러운 지하철역 이미지로 잘 드러난다.  의사 선생님이 아우디도 아니고, 비엠더블유도 아니고 지하철을 타셨다. 그리고 공격적인 시카고의 겨울 날씨가 이들의 삶의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킬 때도 있다. (폭설에 사고가 나서 안 그래도 손 달리는 병원이 급물자부족, 급의사부족을 경험하곤 하니까.) 그리고 이 병원에 찾아드는 환자층은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 부모에게 학대 받는 아이, 가난해서 문제 많은 미국 의료보험 제도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어느 시즌에선가 루시 리우가 무명시절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로 나와서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신인 시절엔 다 어려운 게다) 어쨌든 이 징글징글하게 가난한 병원에 사람들이 흥미를 잃기 시작했는지, 2005년부터 방영된 Grey's Anatomy는 한결 여유롭고 부드러워진다.

Grey's Anatomy
(2005-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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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닥터 그레이가 인턴으로 일하게 된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은 ER이 위치한 팍팍한 시카고의 느낌과는 대비되는 좀더 부드러운 시애틀에 위치한다. 잠못 이루는 도시라지 않던가. 병원은 예산이 아주 넉넉해보이는 사립병원이다. 이곳에서 치프들은 과장 자리를 놓고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외교적으로 경쟁을 벌이고, 그걸 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과장은 다른 병원에서 다크 호스를 데려다 앉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주 관심은 과장 자리를 놓고 싸우는 정치게임도, 치유의 과정에도 있지 않다.

ER에 비하면 아주 호사스런 병원에서 어떻게 우리 젊은 인턴들이 연애를 하시는지 보여주는 데 관심이 많다. 아주 경쟁적이고, 아주 똑똑한 20대 중후반의 인턴들은 그들의 의학적 지식을 시청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는 그들이 똑똑한 건 알고 들어간다. (All that matters in this drama seems to me is who f****ed whom.)  내 개인 취향으로 볼 때, 닥터 오말리를 제외하면 모두 선남선녀 핫걸/핫보이가 드글드글 모인 인턴집합소이다. 누구는 병원에 들어와 완전 똑똑한 상사 레지와 자고 보니 임신이되고, 또 누구는 원나잇 스탠드 상대였는데 알고보니 담당 레지였고, 더 알고보니 그는 이혼도 안 한 유부남이었다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또 처절하게 가난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힘들게 의사가 되어 들어온 금발머리 의사는 환자와 사랑에 빠지나 그 환자가 죽어버려 실의에 빠진다. 이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마음껏 빠진 뒤, 뒷감당을 못해서 마구 괴로워하는 20대의 피곤함을 보여준다. (마음에 드는 남자의사 앞에 Mac-이란 접두사를 붙여 별명을 짓는 새로운 작명법을 선보이기도 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MacDreamy, MacSteamy 등이 있겠다.) 시즌3은 샌드라 오의 결혼 참사(marriage-fiasco)로 막을 내려서, 성질 급한 팬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으나 무심하게도 아직 시즌4는 방영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이상 많은 연애전선과 Grey가 매 에피소드 말미에 붙여주는 삶에 대한 성찰, 그리고 연애에 대한 어줍잖지만 귀여운, 때론 감동을 주는 조언들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다. 이제 하우스 박사님의 세계로)

House MD
(2006-Present)

잘은 모르지만 House는 이런 의학드라마의 지난한 역사과 각축장에서 어떻게 '새로운'면모를 보여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드라마다. (고백: 아직 시즌1 15화까지밖에 못 보았음.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려구횻)

프린스턴의 Teaching hospital이란 점에서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의 연속선상(병원은 깔끔하고 예싼 걱정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뜻)에 있지만, 연애구도를 최소화 하려고 애썼다. 하우스가 이끄는 진단의학과 팀을 보면 하우스를 포함한 남자의사 셋, 여자의사 하나로 짜여있다. 닥터 캐머론(제니퍼 모리슨 역)이 유일한 여의사지만, 10화까지는 어떤 연애의 싹도 보이지 않았다. Grey's Anatomy였다면 10화에 이를 동안 여러 경우의 수를 보여줬을 텐데 말이다. 물론 13화인가에서 닥터 캐머론이 단도직입적으로 하우스 박사님께 자신의 마음을 어렵사리 고백하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아무도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는" 이 괴짜 박사님은 어린 부하 의사에게 난 안 좋아해! 하고 말을 자른다. (눈빛은 거짓말을 한다만. 향후 에피소드 전개에 따라 이 이야긴 달라질 수도 있겠다.)  둘째, 앞서 의학드라마의 CSI 판이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 에피소드에 새로운 의학 과제가 주어지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House는 굳이 매 에피소드를 연달아 보지 않아도 크게 방해받지 않는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다. 한 회 한회가 완결성을 가진 독립 에피소드이다. 그리고 의사 양반들이 흰 가운을 벗어놓고 환자의 병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 환자의 집으로, 집 주변으로 마구 찾아 다닌다. 무단 잠입도 불사하며 병인을 찾는 그들의 노고는 CSI 수사팀에 맞먹는다. 셋째, 팀단위로 움직이긴 하지만, 타이틀 롤인 하우스 박사님의 순발력과 집중력이 치료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다리를 절뚝거리고, 다리의 고통을 잊으려고 먹는 진통제에 중독 된 하우스 박사님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자신의 치료 이유를 설명하는 것엔 인색하지만 그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남겨둘 뛰어난 의사로 그려진다. (지팡이와 약물 중독이란 점은 셜록 홈즈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혼자 추측해 봄) 게다가 이 의사 선생님은 뛰어난 인문/예술 소양을 갖춰서 단테의 싯구를 예사로 읊고, 피아노 연주에 능하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수염은 덥수룩하고, 일견 왜소해보이는 하우스 박사님이 그 파란 눈동자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젊은 닥터 캐머론이 반할 만도 하지.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이 드라마는 의학 드라마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병인을 분석하고 해결한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본 의학 드라마들이 그저 장소만 병원을 빌어 권력을 향한 정치, 경쟁, 혹은 동료애나 사랑,인생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는 '병원'드라마에 그쳤다면 House는 의사가 병원에서 업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근사하고 세련되게 보여주는 진정한 '의학' 드라마이다. 증상을 보고, 여러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물론 이런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딘까 질척거리고 어리버리한 의사들이 벌이는 연애가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2007년 시청자에게 새로운 맛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House의 미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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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이왕 이렇게 된 것 한국 병원드라마의 계보도도 그려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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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4 10:45

    오옷 잼있게 읽었습니다.^^ 이런 의학드라마 보다보면 의대를 갈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더라고요. 진짜 최근에 진지하게 의대친구에게 물어봤는데, 절대 하지말라고, 나는 니 삶이 제일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남들 삶이 부러워뵈는 건지. 의대애들은 인문학하면 고상하게 사는 줄 알아요 참.. 뭐, ER보다는 '고상'하려나... 고상이라... ㅡ.ㅡ;

  2. 서구의학 2007/09/14 19:23

    잘 읽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그레이 아나토미> 밖에는 없지만 덕분에 다른 미국의 의학드라마에 대해서도 좀 알게됐네요..궁금해지기도 하고..시간날때 봐야겠어요.^^

    그런데요, 서구의학이라는 것...근대과학이라는 것에 '정답'이 있다는 생각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회의'가 많이 들어서요...'증상을 보고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과정'도 물론 중요하지만-물론 저도 병원에서 '연애질'만 하는 드라마들, 싫어합니다-그게 모두 '의학'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근대의 인간, 또는 서구의학의 '오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도 인간이라 실수 많이 하고요, 증상의 원인이라는 게 굉장히 복합적이어서 의학적 접근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요..(그게 묘하게 미국인들의 '오만'과 겹쳐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위에 말했듯, 연애질로 점점 흘러가는 것에는 저 역시 불만이 많았습니다만, <그레이 아나토미>에도 미덕은 있지 않았나 생각했지요. 그곳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주인공들은 절대 안죽지만...삶이란, 인간이란, 인생이란...꼭 의학지식,기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걸, 매 주제별로 병원내의 환자/의학관련 에피소드와 주인공들의 삶의 이야기의 접합부분들을 통해 보여준 것. 그런 점은 꽤 흥미로웠거든요.

  3. BlogIcon 하이腦 2007/09/18 15:19

    /기인/ 난 가고싶어도 의대 쪽 재능은 전혀 없기 때문에 못 가. ㅎㅎ 근데 내가 주변 사람을 보건데 의사들만큼 자기 연민이 강한 직업인도 없는 것 같음. 꽤 괜찮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면서도 스스로를 측은히 여기는...ㅋㅋ 차라리 하우스 박사님처럼 오만한 게 더 좋음. 대놓고 똑똑한 사람.

    /서구의학님/ 말씀하신 것처럼 대놓고 '오만한' 것이 하우스의 강점이예요. :) 깔끔하게 오만한, 냉철한 하우스식 진단법/치료법. 참, 저도 그레이스 아나토미를 아주 좋아해요!! ^^ 연애질에 질릴 만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중독성이 있어서요. 각 드라마마다 따로 글을 쓰고싶을 정도로 저 세 병원드라마 각각의 매력이 있죠. <그레이즈 아나토미>는 따뜻하지요..서로에게 연민을 갖는.

  4. 2007/09/18 20:20

    응~ 근데 진짜 의사들도 불쌍하기는 하죠. 그레이즈 아나토미 보기 시작했는데, 제가 심리검사에서 '여성적' '심리적'이라고 나온 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프리즌 브레이크나 24시 같은거 진짜 안 좋아하거든요. 서사만 있고..
    저는 심리묘사가 좋은 거 같아요 :)

    근데 실제 의학도들 자신도 서구의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신체란 사회 구조와 같이 중층결정이 되 있어서, 하나의 병도 실제 그 원인을 알아서 치료한다기보다는 대증요법식이 많죠.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이런 증상이 날때 이런 치료를 하니까 먹혔더라 정도. 개연성 정도.. 백인-남성중심성도 문제가 있고..
    등등이 이게 서구의학의 현단계적 인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의학드라마는 이런 경향보다는 누나말대로 '탐정식-근대과학적 인식'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ㅎ 아나토미 끝나면 하우스도 볼께용 :) 이런 드라마 소개 좋아요. ㅋㅋ
    누나 땜시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한두개가 아니네요 룰루~ ^^*

  5. BlogIcon heine 2007/09/21 11:48

    hehe I'm so flattered, 긴. 근데 시즌1까지 보고 나니까 몇 가지 수정해야 할 이야기도 있어. 역시 love line 없인 드라마의 감동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시즌1 마지막 두 회에선 하우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펼쳐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 뜬금없지만, 나름 기다려왔던 '본 얼티메이텀'을 기다리며 3년 전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을 되돌아본다. 캬. 영화 시리즈를 기다린 것은 처음인 듯! 결말이 정말 궁금하다. 본 얼티메이텀을 보기 전에, 기억을 되살릴 겸 해서 올려본다. 최근에 본 '미드' DEXTER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기도 했고 ^^


새로운 슈퍼맨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물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본'은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며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를 비춘다. 인간소외, 군중, 익명성, 고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단지 직장을 가지고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경제적, 성적 필요성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 받고 구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본'은 사고로 인해 기억을 상실했고 혼자이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억상실증'환자를 다루었지만, 그들은 항상 그들의 기억을 채워넣으려는 주위 사람들로 둘러쌓여있다. (예외적으로 '메멘토'라는 영화의 단기기억상실증은 과거의 자기 자신이 늘 자신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본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혼자이다. 기억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물론, 이를 구성하게끔 하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 상사, 부하 마저도 없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가지만 그 곳은 무인도이다. 그에게는 '그' 마저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물을 수 밖에 없다. 'who was I?' 현재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받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슈퍼 히로들은 고독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인 슈퍼 히로적 정체성을 숨기고 현실 생활에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아주는'이가 없고, 그들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슈퍼맨의 붉은 빤스와 파란색 타이즈, 베트맨의 가면 등은 그 코스튬으로 가려야만 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그들의 코스튬이고, 그들의 가면이다. 클락 켄트의 안경이나 웨인의 턱시도는 '참' 모습을 가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슈퍼 히로일 때의 삶에서의 위안과, 일상 생활에서의 즐거움(오 그 미녀들! 007 본드걸만 욕하지 마라... 기실 모든 슈퍼히로의 원형은 이런 '스파이' 또는 '비밀 요원'일지 모른다. 본도 또한 '비밀요원'이다.)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그 슈퍼히로들의 '본드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알아간다는 사실 또한 떠올려보자.

이렇게 '행복한' 슈퍼히로에 비해, 우리의 '본'은 그렇지 않다. 그의 '여인'조차 1탄의 중반 이후에 등장해서 2탄의 초반에 죽어버리고 만다. 일상 생활이 없고, 관계도 없다, 또 기억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였는가?'를 묻는다.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을 재구할 수 밖에 없다. 유일하게 그를 타인과 구별해주는 것은 '살인기술'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킬러였다, 그리고 킬러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2편은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이 죽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여인과 그녀와의 관계가 '본'의 핵심이다. 비록 그녀가 기억상실 이후 본이 짧게 만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본'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CIA 관찰관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려고 할때, 본이 거부 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이제 'who I was'를 묻지 않는다. 본은 분명 킬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본에게 그가 킬러'였음'과 상관없이 그는 지금 '그'임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당시 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절히 본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본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 위치를 규정할 수 있고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한발의 총성과 함께 흐려진다.

'적'들에게 '본'은 아직도 킬러이다. 이제 '그녀'의 사랑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그녀가 사라진 이상, '본'이 가장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법은 적들의 호명 -킬러로서의 본-에 응답하는 길이다. 그러나 '본'은 CIA관찰관이 자신의 과거를 말해주는 것을 듣기 거부한채,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러 나선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의 폭은 적다. 그가 그임이 그녀와의 관계와 그 추억에 의해서 확인되었지만,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본은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 관계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한채, '일반인'으로의 위장 잠입의 형태로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슈퍼 히로의 이중현실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두 현재를 살지만, 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로.

아니면, 다시 본은 어떠한 경로로든 자신의 '적성'과 '과거'를 살려 킬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애써 정립했던 그녀의 애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떨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행로이다. 이제 그 대답을 하게 될, 3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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