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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 대해 연인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근데 변하더라."라는 답을 듣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의 '로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너뿐이야', '사랑해서 결혼했다'와 같은 말을 매우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연식'이 오래된 인간일 수록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이며, 무책임한 말인지를 깨달아 가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허위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

'가족애' 등으로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좀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영구성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 <시간>(김기덕, 2006)에서는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포하게 되는 권태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육체를 바꾸는(성형수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려하는 여성이 등장하고,

<엘레지>(이자벨 코이셋, 2009)에서는

사랑의 비영구성을 냉소하면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 시간과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그 사랑의 소멸,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동인이 육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어쩌면 지나치게) 의식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적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시간>의 새희(성현하 분)와 <엘레지>의 데이빗(벤 킹슬리 분)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랑을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미리 사랑을 떠나보낸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낭만적이지만 허구적인 모토를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매우 영리하고 현실직시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몸이 늙고 병들고 추해졌을 때에도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플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라는

결혼식 주례사는 얼마나 지키기 힘든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현명함은 한편으론 유아적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시간을 통해 변하고 퇴색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언젠가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넌 결국 날 떠나게 될거야'라며 한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선수쳐서 떠나보내기'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이 겪을 상처보다 자신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는 자기방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불안한가에 대해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의 불안은 사실 사랑의 다른 모습이거나 그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불안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퇴색시켜 버린다.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매번 사랑에 빠지는가?

냉소만으로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버려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금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이별하게 될 때 자신이 겪게 될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그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 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물론 그 '소중한' 사랑은 영원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감정은 강렬한 실재이다.

 

새희와 데이빗은 헤어졌던 연인들과 다시 만난다.

너무 오래 만나 자신의 몸이 지겨워져서 떠날 거라 생각했던 새희는

완전히 바뀐 새로운 육체로 지우(하정우 분)를 유혹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열 다섯살이나 젊어, 결국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에게 떠나버릴 거라 예상했던 데이빗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병든 육체와 다시 대면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재회'는 무엇인가.

이 영화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영원한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유치한(?) 수준의 영화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지나친 자기방어 덕에 다시 시작된 사랑은 이미 빛이 바래 버렸다.

새희는 과연 지우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그가 사랑하는 건 성형 수술 전의 새희인가, 성형 수술 후의 새희인가?

데이빗은 과연,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도 콘수엘라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들의 불안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 <시간>은 지우가 과거의 새희를 잊지 못하자, 새희는 자신의 과거 육체에 대해 질투를 느껴야만 하게 되고,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가 모두 새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지우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바꾼 뒤 우연한 사고로 급사하는 결말을 그린다.

그녀의, 시간을 통해 변질되어 버릴 사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대상의 죽음을 통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전신성형으로 이제 지우인지도 불분명한, 그러나 지우인 것 같은 주검 앞에서

새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가.

완전히 다른 육체가 된 연인에게,

이전보다 아름답고 젊은 육체가 되었건, 싸늘한 시신으로 마주하게 되었건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이 가능한가?

 

영화<시간>은 이처럼 사랑과 시간과 변화와 육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비현실적일만큼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날카롭게 문제제기하고 있다.

 

 

한편  <엘레지>는 이러한 불안을 영화에서 더이상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을 맺지만

이러한 '열린 결말'을 통해서 영화는 다른 무언가를 더 말하고자 한 듯 하다.

 

그동안 50명이 넘는 여성과 사귀어보았고,  

콘수엘라에 매혹된 자신의 감정이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특히 그녀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데이빗은

겨우 5명의 남성을 사귀어 보았다는 콘수엘라의 과거(?)에 끊임없이 집착한다.

혼자 쿨한 척은 다하고 콘수엘라를 만나는 동안에도 오랜 섹스파트너도 주기적으로 만나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콘수엘라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녀에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마다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날까봐 의심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경륜을 근거로

콘수엘라와 자신의 사랑이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데이빗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는 콘수엘라이다.

데이빗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심과 집착의 태도와

그러는 한편 종종 보여주는 '너는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젊고 멋진 남자에게 가게 될거야'라는 말 사이에서

콘수엘라는 그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장난감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진 않지만 감정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

언젠간 자신도 가지고 놀다 버릴 것이면서도 빼앗기긴 싫어하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는 것.

 

데이빗은 자신의 콘수엘라에 대한 집착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도 포기한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사랑하는 방법을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수엘라가 그녀의 졸업 축하 가족파티에 그를 초대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요?"라는 콘수엘라의 원망에 아무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그래 다 끝났다. 진작에 이렇게 될줄 알았다'며 체념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사랑은 잊혀질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2년이 넘도록 제대로 잊지 못했다.

그러다 2년 뒤 그녀에게서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당신에게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메시지에

새삼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할 말'이란 그녀의 결혼 소식쯤이 될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에게 콘수엘라는 '당신은 늘 내가 너무 젊다고 했는데...지금은 내가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데이빗은 자신의 그동안의 생각의 오류를 깨닫고

뒤늦게 콘수엘라에게 다가가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는 콘수엘라의 암 진행 정도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서도

그녀가 죽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술 뒤 병들고 지친 콘수엘라의 육체 앞에 나타난 데이빗이

용기를 내어 그녀의 병상에 자신의 몸을 비스듬히 뉘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의 앞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당장은 그녀 옆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투병생활이 참혹하거나 지리해지면서

데이빗은 차츰 그녀로부터 떠나게 될 수도 있고

그러기 전에 그녀가 죽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또는 운 좋게 그녀가 완치되어 정말 데이빗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데이빗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길었다는 것.

육체의 노화나 소멸은 단지 통계학적으로만 짐작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감정 역시 경험이나 통계만으로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나친 허위의식 속에 지금의 사랑을 신성시 하거나 낭만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지적 통찰력을 믿고 온전히 'fall-in-love'하지 못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쯤해서 <엘레지>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병 앞에서 사랑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좀 더 '고수'들을 직접 보여주는 드라마가 하나 떠오른다.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2002)의 훌륭함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점은

고복수(양동근 분)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 앞에서도

전경(이나영 분)과 복수는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곧 죽을 지도 모르고, 수술을 받은 뒤에 장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경은 용감하게 계속 사랑한다.

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경을 만나고,

경은 복수의 병을 알고 난 뒤에 복수에게 청혼을 한다.

물론 복수는 결혼을 하자는 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아예 소멸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까지는 포기하지 못했어도 결혼까지 할 엄두는 못내는 것이다.

 

그때 경이 말한다.

"우리, 살아있을 때 살고, 죽었을 때 죽어요. 살아있을 때 죽지 말고, 죽었을 때 살지 말아요."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이며 쉽지 않은 말인가.

 

몸의 변화와 소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마음까지도 변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자세는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명분 하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쿨함'의 가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재의 감정과, 그 속에 배태된 불안까지 껴안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그러했기 때문에 헤어지게 될 때에는 후회나 미련 한 방울 남기지 않으며  헤어질 수 있는 것.

 

헤어질 때를 걱정하며 사랑하고, 사랑했을 때에 대해 회한을 남기며 헤어지는 것은

똑똑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자들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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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7 - [Mad for Drama/한국 드라마] - 흥행코드 읽기와 스토리텔링-아류작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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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겨울연가> 탓이다"

현재 한국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들을 망쳐놓은 것은,
배용준을, 문화부장관 후보의 갑절이상 부자로 만들어주고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겨울연가>이다.

<겨울연가>가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얼마나 잘, 똑부러지게 따르고 있는지는
굳이 또 얘기 안해도 될 것이다.
분명 2002년에 이 드라마는
현재의 '일드'열풍을 일으키고 있듯 우리보다 한 수 위인 일본 드라마시장에까지 먹힐 수 있는
멜로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모범'사례였다.


그러나 '최대치'란, 다시 말해 '정점'을 찍고,
이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대단한 <겨울연가>는 사실,
<가을동화>의 신선함들을 훨씬 세련되게 포장한 것으로,
이미 <가을동화>의 여러 '상투적' 설정들이 한번 '복제'된 것이었다.
그래서 <겨울연가>는 <가을동화>만큼 한국땅에선 큰 반향을 못일으켰었다.
이것은 4계절 시리즈를 만든 윤석호 감독의
이후 두 작품, <여름향기>, <봄의왈츠>가
모두 '썰렁하게' 막을 내린 데에서 분명해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겨울연가>가 먼저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보다 신선하게, 그러면서도 세련되게 첫선을 보일 수 있었다.
그 이후 여러 편의 '겨울연가류'의 드라마들이
일본에 우수수 알려지게 되고, 다 그럭저럭 좋은 반응을 일으키며
한류드라마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도 한국드라마의 그런 '전형'적 설정
-출생의 비밀, 불치병, 첫사랑, 기억상실증, 재벌2세,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등-은
진부함, 천편일률적임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니 이미 <겨울연가>에서도 이 진부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한국에서야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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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한국의 드라마는 '멜로'를 찍기로 하면
일단 '겨울연가류'를 제일 먼저 참고하고 있는 듯 했다.
최근 나온 한국의 '멜로코드' 드라마들 몇개를 살펴보자.
<못된사랑>, <사랑에 미치다>, <푸른물고기>.
이 세 작품은 2007년~2008년 초에 방영된 드라마로
이미연, 고소영, 이요원, 권상우, 박정철, 윤계상 등
우리나라에서 '초특급 스타 배우'로 불릴 만한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와 제대로 몸값 비싼 티를 낸
배우들이 출연한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사랑에 미치다),
옛 남자의 처남이자 재벌2세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첼리스트(못된사랑),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뒤 첫사랑을 기억 못하는 재벌2세 여자가
첫사랑을 다시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푸른물고기),
일단 설정은 매우 '극적'이지만, 그 다음이 없다.


저 설정에서 더 나올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란 사실을 모르는 동안,
자신의 매형과 여자의 관계를 눈치 못채는 동안,
첫사랑이란 사실을 기억못하는 동안,
서로 바보짓 해 가며 사랑놀음, 감정싸움, 삼각 사각관계의 연애를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다가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그것때문에 괴로워하는 단계를 지리멸렬하게 그리다가
결국엔 사랑의 승리(?) 나부랭이로 끝을 맺게 된다.
더구나 그렇게도 극적이고 대단한 사랑얘기이지만,
정작 사랑에 관한 본질은 아무것도 통찰하지 못한 채
막연한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피상적으로 그리는 데 그친다.


이런 껍데기밖에 없는 '멜로'는
그들이 그렇게도 '숭배'하는 '사랑', 그 하나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며
세상엔 사랑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듯 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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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애는 자기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언제나 인간의 최고의 관심사다.
그러나 사랑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고,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들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경치좋은 곳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아이스링크를 통째로 빌려 스케이트를 즐기고,
바닷가에서 '나 잡아 봐라'를 외치는 것으로만 설명되어선 안된다.

사랑은 서로 다른 두 명(이상)의 사람들이 만나
많은 차이들을 깨달아가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더 큰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율해가는 과정이며,
드라마가 보여주는 '소비'적 데이트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의외의 장소, 상황, 행동,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놀라운 경험들이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거라 믿어지는) 감동의 이벤트가 주는 행복은
패밀리레스토랑의 음식 사진과 같은, 미니홈피 전시용 사랑일 뿐이다.
진짜 사랑은 소비되는 물질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연인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 욕망, 상황, 상처 같은 것들이
'대체로' 행복한 어떤 상태로 고양되고 재구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진정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가 되려면
그런 '진짜 사랑' 얘기를 '독하게', '아프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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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제대로 보여주는 훌륭한 드라마들도 물론 그동안 여러 편 있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몇개 꼽으라면,
<네멋대로 해라>, <거짓말>, <거침없는 사랑>,
<발리에서 생긴 일>, <굿바이 솔로>, <연애시대>같은 것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진부'하다 치부되는 '삼각관계'나, '불륜'이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불치병'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결코 진부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자주 남들의 기준에 의해 통속화되지만,
이런 드라마들은 그런 자신을 다독이고 되돌아보게 하는, 참 곱씹을 수록 맛난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지금 사랑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드라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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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드라마들이 그래서 새롭게 사랑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면,
<못된 사랑>, <푸른물고기>, <사랑에 미치다>는
'통속화'를 부추기는 '남들의 기준'을 공고화한다.
현실에는 부재하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
실존하는 다양한 사랑들에게 열등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열등감의 실체는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그저 그들의 '위대한 소비', '위대한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망하길 잘 했다.
대중들은 그렇게도 똑똑하다.
대중들은 앞으로도 철저하게, 이런 드라마들을 응징할 것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절대로 다신 나와선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대략 세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지독한 사랑의 성찰'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는 길이다.
이것은 보통의 '내공'이 있는 제작진이 아니면 쉽지 않겠지만
가끔 한 편씩 세상에 나와줘서, 이 세상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두번째는, '말랑말랑' '유쾌상쾌' 로맨틱 코메디로 승부하는 것이다.
비극적 멜로를 저따위 피상적 사랑얘기로 다루기 위해
기억상실증, 불치병, 출생의 비밀, 신분 차이 같은 걸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가벼운 사랑은 가벼운 사랑답게, 유들유들한 코메디와 곁들여 내놓는 것이다.
작년의 <커피프린스1호점>이나
몇년전 '겨울연가' 짝퉁 <여름향기>가 죽쑤고 있을 때
의외의 선전을 거둔 <옥탑방 고양이>처럼,
평범한 청춘들의 평범한 사랑 얘기를 '즐겁게' 그리는 것이다.


세번째는, '사랑밖에도 많이 알아'가 되는 것.
이것은 전반적인 한국 드라마가 가야할 방향과도 관계가 있다.
현재의 '미드', '일드'에 열광하는 드라마마니아들의 눈높이에
'사랑밖엔 난 몰라' 드라마는 절대 충족감을 안겨줄 수 없다.
사랑은, 분명 인간들의 최고의 관심사지만, 사랑 말고도 세상엔 흥미진진한 것들이 무척 많다.

현재의 사극열풍이나 의학드라마들의 연이은 성공은
이런 '고급' 드라마시청자들이 드라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물론 긴 호흡으로 방영되는 동안 주인공들이 '행복한 짝짓기'를 하는 과정에
여전히 관심이 많다.
남의 연애사는 일상 속의 최고의 활력소니까.
그러나 매일같이 '답이 뻔한' 연애문제로 징징대는 친구의 상담역할은 참으로 못할 노릇이듯,
사랑, 연애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드라마는 대중을 지치게 한다.

열심히 자기 삶을 살고,
그 속에서도 충분한 희노애락을 구성하면서
그 안에 사랑이 조금 더 희/노/애/락을 심화시키는 이야기.
그런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제 리조트의 이사나, 재벌 2세 실장님, 언제 작업하는 지 모르겠는 예술가 대신
수많은 진짜 직업인들이, 진짜 '꾼'들이,진짜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일에
앞으로의 드라마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런 점은 앞서 말한 첫번째, 두번째 대안들도
어느 정도는 지켜나가야 할 덕목이다.
<네멋대로 해라>에도 경이와 복수의 사랑에 관한 통찰 곁에는
언더음악가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과 스턴트맨의 성장스토리가 탄탄하게 들어있었다.
로맨틱코메디로서도 이 세번째의 특성을 잘 보여준 것이
<커피프린스1호점>의 '바리스타'라는 직업이고
<내이름은 김삼순>의 '파티쉐'가 아니던가?


각설-
원래, 이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만든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그저께, 드디어 <이산>(49회)에서
송연이가 정조에 대해, 대수가 송연이에 대해
사랑을 인정하고 밝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 하나가지고 또 이렇게 길게 주절거리다니...나도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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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은 할 수만 있다면 (후궁이 되어서) 그분 곁에서 있어드리고 싶어."
"이제 전하 뒤에서 지켜보는 일 그만하면 안되겠니? 난 안돼?"
라는 송연과 대수의 '엇갈린 사랑'에 대한 고백의 씬은
아주 짧게, 스쳐가듯 등장했다.
둘 다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한 지 6개월만이며, 극중에서 그들이 만난 지 십수년 만이다.
그동안 정조와 송연은 궐에서 마주치면 몇 마디의 농담을 주고받고
상대방에게만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최고로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힘들때 '누구보다 당신을 믿는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만으로
사랑을 표현해 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현재 월화 드라마의 최고 강자이며,
아예 다른 방송국에서도 이 드라마 종영때까지는
섣부른 '도전'을 할 엄두를 안낼 만큼
쉽게 꺾이지 않을 인기를 얻고 있다.
결국에 송연과 정조의 사랑 얘기는 앞으로 점점 비중이 늘어날테지만
여전히 더 궁금한 것은 둘의 사랑보다 정조의 노론 세력들과의 '파워게임'쪽이다.
사랑은 그 속에서 '순리대로' 감정을 키워나가
주인공들의 사랑 외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만드는 한 부분이어도
충분히, 이 드라마는 매혹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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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드광팬 2008/03/07 00:35

    오 쿨야님 글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연애시대'는 참 재미있게 봤는데, 요즘 드라마는 정말 듣보잡이에요.
    일드 중 쿨야님이 말한 '사랑'이랑 잘 매치되는 것으로 '결혼못하는 남자'라는 드라마 강추입니다.
    일드의 세계에도 진출해서 많은 좋은 평 올려주시옵서서~

  2. BlogIcon coolya 2008/03/07 08:29

    일드광팬님, 감샤함미당~사실 제가 일드 미드의 세계에는 아직 제대로 입문을 못해서,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할지 감이 없었답니다. 님의 추천 덕분에 또 몰입할 드라마가 하나 생겼네요~^^'결혼못하는남자' 꼭 보겠습니당~보고 난 뒤 이곳에서 또 얘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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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패는 처음부터 노출되어 있다.
 

치아즈(탕웨이 분)가 이(양조위 분)에게 접근하여,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대학의 친구들과 함께 벌인 치기어린 '쇼'로 한번,
3년 뒤 반군 조직에 의해 보다 철저히 준비, 위장된 '작전'으로 한번.


 

 첫번째 접근에서는, 그들의 정체가 금세 탄로나리라는 것이 쉽게 예측된다.

그들은 그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고,

돈 좀 있는 집 자식인 한 친구의 비상금을 털어

어쭙잖게 도모한 '결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치기어림, 어쭙잖음으로도

그나마 치아즈와 이의 단독 만남까지 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치아즈의 매력의 힘이었다.

이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자태에 현혹되어

그녀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런 연극에 한 꼭지 출연해 놀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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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연극은 이의 갑작스런 상해로의 귀국으로 금세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의 연극이 이의 부하이자 광위민의 동향 선배였던 조덕희를 통해

얼마나 허술한 애들 장난이었는지가 밝혀진다.

치아즈 패거리는 조덕희를 우발적으로 죽이면서

해산되고, 3년이 흐른다.



3년 뒤, 그동안 중경정부의 첩보단 조직에서 일하게 된 광위민이 다시 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는 그녀에게 3년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실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치아즈는 이를 수락한다.

그녀는 중경정부 조직의 오와 만나 이에게 다시 접근할 방법에 대해 학습을 받고

그녀의 신분도 막부인으로서 좀더 철저하게 위장된다.

재회한 이와 치아즈는 3년 전에 못 다한

서로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밀회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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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역시, 그녀의 신분은

너무도 쉽게 이의 부하들에 의해 노출되어버린다.

다만, 그녀에게 빠져있는 이에게 보고만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치아즈의 정체는

'첩보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쉽게 발각된다.

즉, 그녀의 '첩보'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조덕희와 이의 부하가 치아즈와 그녀의 조직에 대한

조사 결과를 줄줄 읊는 장면들은

그녀의 '임무'와 '소명'이란 것이

얼마나 하릴 없이 파괴될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줘서

허탈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중경정부의 첩보원이 사랑(욕망)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는 내용이라는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사전 정보는 조금 잘못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됐다.



처음부터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나 국가(민족)의 강요에 따라

이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거나 포기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 끼고

이에게 '가요...어서 도망쳐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는 죽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살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가 암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죽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미 이의 조직에서는 그녀의 정체와 그녀 관련 조직단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가 죽은 뒤에 그녀의 단체 역시 모두 체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가 소속된 왕정위의 정부는 그녀의 조직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잡아들여 처리할 수 있을만큼

훨씬 철저하고 치밀한 조직과 정보망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녀를 계속 감시하고 주시하면서,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놓고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첩보'나 '암살' 등을 목표로 한 한 여자의

국가적 차원의 행위, 결의를 다룬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에 있어서 치아즈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1938~1942년, 항일, 반제, 애국 등의 시대적 배경은 그냥 이 영화를 화려하고 심오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적당한' 외피에 불과하다.



나에겐

"원수인 한 남자에게 응징을 하기 위해 접근한 한 여자가

그와 만나면서 결국 사랑을 하/믿게 되는 과정"

이라는 편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더 적절한 독법으로 보였다.



2. 그 남자, 그여자

남자,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일반적인 사랑'의 문법으로만 대했다.

다만, 자신의 상처와 삶의 방식 때문에

표현 방법이 때때로 거칠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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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집에 놀러온 그녀와 말을 섞고,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돌연 한 우산을 쓰게 되면서 가슴떨려하고,

그녀의 연락처를 외워 그녀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자신의 일때문에 3년간 소식을 모르다가 다시 만나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고,

영화를 보러가는 그녀를 납치하듯 데려와 '당신을 가지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야?'라며 가학적인 섹스를 하고,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갈 지 모른다는 사실에 초조해하며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정사를 나누며

아무도 믿지 않는 것 만으로 지켜온 자신의 목숨이지만 그녀의 말만은 모두 믿겠다고 말하고,

바쁜 일들 속에서도 그녀 생각때문에 일에 집중하질 못해 괴로워하고,

그녀의 위로와 그녀가 불러주는 "우린 영원히 함께 하리이다"란 노래를 부르며 잡아주는 손 앞에서 눈물을 짓고,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반지 따위는 관심없어,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의 감정은 언제나 솔직하고 명료했다.



문제는 여자, 치아즈이다.

그가 저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공식대로' 사랑에 빠져들고 있을 동안

치아즈는 자신의 정체성때문에 그 말들을 오인하기도 하고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의 행동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게 아닌지,

그가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인지

늘 확신이 서지 않아 두려워한다.



이 불안과 불신을 어떻게 넘어서서

치아즈 역시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가의 과정이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3. 놓아라,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더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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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과 불신을 일거에 소거해 버린 것은 반지, 다이아몬드였다.

이것 때문에 혹자들에게서는 이 영화가(혹은 치아즈 캐릭터가)

"왜 다이아몬드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그 남자에게 넘어가느냐?" 또는

"다른 건 다 안되고, 다이아몬드에 넘어가는 게 사랑이냐?" 등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또한 "결국 여자한테 사랑이란 다이아몬드와 섹스 아니냐"는,

좀더 냉소적인 말로 그녀의 감정의 '이동'을 이해해주는 축도 있다.



그러나 반지는 값비싼 물질이어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 반지 앞에서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설명해 준다.



마작을 함께 하던 이의 부인이 이에게 "지난번에 사달라는 다이아도 안사주고"라며 핀잔을 하고

이는 "다이아도 돌덩이인데 그런 거 끼고 있으면 마작 패도 못들걸"이라며

아내에게는 다이아몬드 선물을 해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치아즈에게도 말했듯 다이아몬드 따위는 관심이 없으며, 그것은 돌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끼고 있어봐야 생활하기에도 불편하기만 한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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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치아즈에게는 선물하고, 그걸 낀 그녀의 손이 보고싶다는 소박한 진심 때문에,

그 '비실용적'이고 비싸기만 한 6캐럿짜리 비둘기 알 반지를 그녀에게'만' 안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귀한 걸 끼고 거리로 나가기가 두려워요"라고 말할 때

"내가 함께 있어주잖아"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확신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이아몬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면 어떤 것이든

그녀는 그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다이아몬드'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의 확인,

그리고 오랜 세월 고독과 두려움에 길들여진 자신과 함께해 주겠다는 그의 약속이었다.



감독이 다이아몬드라는 상징적인 '물질'로

치아즈 감정이 고조되는 정점을 만들어 낸 것은 어떤 점에서 무척 손쉬운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낼 감정의 '불순'에 대한 오해를 덜기 위해

영화의 도입을 '다이아몬드'에 관한 대화로 시작했던 것은 나름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4. '시작'과 '확신'의 지점?

그러나 '다이아몬드' 지점은 그녀가 그의 사랑을 믿게 되는 지점이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지점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일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을때, 그 사랑이 언제부터인지를 더듬어보는 것 만큼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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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순간 반했다, 식의 말을 하기 좋아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사후적으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낭만 모멘트일 뿐

감정의 기점같은 건 찾기 어려운 법이다.



치아즈에게 있어 이를 사랑하게 된 순간은

어쩌면 1938년 처음 만나 인사만 나눈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날 돌아와서 치아즈는, 원래 피우지 않던 담배를 아주 익숙하게 꺼내 물고,

이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 친구에게 "살짝 봤는데...상상했던 거랑은 다르더라"라는 말 한마디에서

이미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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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와 함께 빗속에서 우산을 쓰게 되었을때, 함께 양복을 맞추러 갔을 때, 함께 식사를 할때,

처음 섹스를 했을 때, 섹스 도중 절정에 올라 울부짖게 됐을 때,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등

그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그녀의 감정이 움직였음은 오와 광위민 앞에서

자신이 그에게 마음까지 빼앗기고 있음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이미 확실해졌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사건 이전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다만 그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 자신의 마음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씬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는 첫 지점이 아니라,

치아즈가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반지 상점에서 뛰쳐 나와 도망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부하로부터 그녀 일당의 정체에 대해듣고

화를 내며 그동안 왜 보고하지 않았냐고 묻자 부하는,

"그건...두분 관계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물론...지금은 확실해 졌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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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하가 확신하지 못한 '두분 관계'란 무엇인가?

제3자의 눈에서 볼 때,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임에도,

그들의 관계는 '정치적 게임'의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었을까?

'첩보'의 문제로만 접근하기엔

이도 치아즈도 '감정'이 너무 강렬해 보여서

어쩌면 '적대'관계가 아닐지도,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

그녀에 대한 보고를 미뤄뒀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확실해' 진 것은

명백한 암살계획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5. "욕망, 그 위험한 色, 신중, 그 잔인한 戒"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정치 게임'이 아니라 '사랑게임'으로 점철된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 제목이 말하는 '색'과 '계'는

사랑이라는 개인적 욕망의 '색'과

국가, 이념, 정치 등이 강요하는 룰의 '계'의 충돌로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촉발되는 욕망(색)과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인지하지 못하는 사랑의 룰(계)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을 항상 불안하고 두렵게, 그러면서도 지독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드러냄/인지를 힘들게 하는, '신중함'에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 '신중함'때문에

유지되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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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쾌락의 역설'이다.

모든 욕망이 너무 쉽게 충족되면, 쾌락의 역치는 점점 커진다.

그것은 결국 욕망을 사그러들게 만들고, 사랑을 끝장내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쾌락을 주지 못하므로

점점 지치게 만들고, 욕망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와 치아즈가 그렇게 치명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욕망(색)과 신중함(계)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잘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힘은 자신들의 신분-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양자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계'를 포기하는 순간

'색'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죽은 치아즈도, '일단은' 살아남은 이도

그들의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살아가야 하는 이의 고통이 심할 수도 있다.

그는 믿어의심치 않았던, 그래서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던

치아즈의 사랑을 이제부터 다시 되짚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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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뿐인것일까.

그녀가 마지막 순간 자신을 도망치게 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순간까지 철저히 자기 신분을 속이고, 암살계획의 현장으로까지 자신을 이끈 것은

그동안의 관계가 모두 거짓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게 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그녀를 자신이 처형하도록 명령해 죽였다.

이 삼중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의 운명은,

(물론 1945년 뒤에는 어쩜 살아있기도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믿으며 죽을 수 있었던 치아즈보다 훨씬 가혹할 것이다.




6. 덧붙여-

이 영화는 2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이라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두 개의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8년 이야기/ 1941년 이야기

두 개의 닮은 꼴 이야기가 각각 완결된 기승전결을 지니고 있으면서

첫번째보다 두번째에 모든 것의 강도를 높여놓았다.

그러나 기본 틀은 두 개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

이것이 이영화의 재미난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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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이야기에서

이와 치아즈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가 하는 말,

"입고 계시오."와 "끼고 있어"는

그의 그녀에 대한 감정과 그것의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말이어서

짧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한!!!!

절대 잊지 못할 것은

이 영화 속 양조위의 눈빛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찍은 영화속의 삶을 진실로 살아낸 것은 아닐까 싶을만큼

그 상처와 외로움이 나이와 함께 체화된 듯한 그 눈빛, 표정은

이 영화가 주는 최고의 매력이다.



다시 양조위가 출연한 영화들을 찾아서 다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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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중국, 색계 실제 주인공 사진전

    2008/01/12 21:31 | TRACKED FROM China Life

    영화 ‘색, 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국 광둥(廣東)미술관에서 색, 계’의 실제 주인공의 사진이 전시돼 영화 팬들의 눈길 색,계의 중국 영화 포스터 이안감 영화 ‘색, 계’는 중국 여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이 1939년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재로 쓴 소설 ‘색계’를 토대로 만든 작품 실제 주인공 출중한 미모의 정핑루(鄭蘋如) 1937년 일본의 상하이 점령 이후 각 정권간의 치열한 첩보전 속에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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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ㅎ 2008/01/09 18:03

    재밌는 글이네요. 같은 이유로 저 역시 양조위 씨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죽 훑어보고 있습니다.

    • BlogIcon coolya 2008/01/09 19:39

      앗, 감사합니다...
      글이 길기만 길고, 얘기가 산만하고 두서없어서
      사실 쓰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감사함미당.
      양조위, 쵝오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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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단어는 참 어렵다.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또 사랑한단 말을 아껴도,
어느 쪽도 <사랑>이라는 기표에 온전히 다다르는 것 같지 않다.
사랑이란 말은 아무 힘이 없기도 하고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처음부터 너무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일까?
사랑한다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하고 특별한 어떤 감정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랑은 무언가 운명적이고 영원해야 할 것만 같은데,
사실 사랑은 대체로 우연적이며 일시적이다.

그래서 사랑한단 말을 하는 사람과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어느쪽도 모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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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유일하고, 영원하며, 그렇게 숭고한 것이라면
함부로 사랑을 말해서도, 듣고자 기대해서도 안된다.
또 사랑이란 결국 흘러가버리는 것이고 별로 대단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적인 감정일지라도 좀더 쉽게 사랑한단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끊임없이 사랑을 말하고 듣길 갈구하며
사랑이란 말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굳이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는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당신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쪽인가, 아니면 말을 아끼는 쪽인가?"


<눈물이 주룩주룩>에서는 부모의 재혼에 의해 남매가 된 남녀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남자가 죽은 뒤 남긴 것들, 편지를 통해 아련히 깨닫게 된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는 육체적으로 성장을 하면 병도 함께 커져 죽게 되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장억제제를 먹지 않음으로써 죽고,
그 사실을 죽은 뒤 그녀가 남긴 사진과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영화는 <러브레터>였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사랑을  '죽음'을 통해, 죽은 뒤에야 말한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이 유일한 경우는 드물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딱 한개씩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죽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음을 통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말해진 사랑이란
어쨌거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완성'될 수 있으며,
그 사랑에 대한 더 이상의 회의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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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영화들은 숭고한 사랑을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판타지를 제공하는 듯 하다.
그러나 죽음이란 상황이 또 지나치게 '극적'이며,
모든 것을 '미화'시킨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이 사랑들에서도 냉소의 여지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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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다시 해보자.
"당신이 1분 뒤 죽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사랑했단 말을 남길 수 있는가?"
의외로 이 질문에서 긍정의 답을 망설이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기때문에 이 세 영화의 사랑은 한편으로 비겁하다.
죽음이 사랑을 미화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이것은 그 외의 방법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에 비해 너무 쉽다.
우리가 실제로 이런 고백을 듣는다면,
그 순간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물론 나는 그 감동도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허구 속의 이 방법은 이미 너무 진부한 '장치'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이 영화들은 관객이라는 제3자의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한 그 사랑을 살아남은 자에게 전달, 완성시킬 수 있다.
그러나...그것은 어디까지나 제3자에게만, 남의 사랑을 얘기하는 선에서만 그렇다.
이미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이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 둘에겐 사랑은 끝난 것이다.
다만 죽은 자는 그와 함께 삶도 끝냈기 때문에,
산 자는 그 뒤의 삶을 영화속에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완성처럼 보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가 죽어버린 자의 마지막 고백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것은 죽은 자의 사랑의 완성일뿐, 살아남은 자의 사랑은 여전히 '움직인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또 살아나가게 되고,
그 고백을 서서히 잊게 되고,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들은 죽은 자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자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장치들을 활용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의 사랑에 흠뻑 감동하도록 만듦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마음 속에 남은 사랑을 그리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눈물이 주룩주룩' 나고 "오겡끼데스까"를 하염없이 외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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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쪽인가 하면, 사랑한단 말은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다.
결국 그 감정이 변해버릴 지라도, 사랑은 살아있을 때 하고, 말해지는 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죽어버린 사람의 사랑고백은 값진 것이기는 하지만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가, 사랑이란 말을 아끼면
결국 그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 버렸을때
지난 사랑을 사랑이었다고 추억하지조차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고 유일무이하다는 환상과 기대를 조금 덜어낼 필요는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현재로서는 '실재'한다면
그 순간에는 사랑하노라고 말해두는 편이
그 순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그 이후에 더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만든다고
나라는 1/n의 한 사랑은 생각한다.
(물론 (n-1)/n개의 사랑들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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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7 09:13

    잘 읽었습니다. 산타클러스가 없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문득 깨달았던 것처럼, 대문자 '사랑'이라는 것도 20대에 몇번 사랑을 경험하고 난 후부터, 문득 깨닫게되는 것 같습니다. 효~ 이렇게 나누는 것도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30대에는 쫌 더 자유롭고 유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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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남녀간의 사랑이 시작되고 깨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순간들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데뷔작이었던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남자와 너무도 건강하고 해맑은 여자 사이에 호감이 연애 직전까지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다뤘다. 미래가 없는 남자는 여자를 일정한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여자는 그의 태도가 원망스럽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끝을 예감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마음 아픈 관계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계속 변주되는 모티프이다. <봄날은 간다>의 여주인공인 은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상우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었지만, 마음마저 지울 수 없는 것이기에 돌아왔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상우는 은수와의 이별이 한번 두번 쌓여갈수록 마음속의 미련들을 조금씩 털어내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덧없는 ‘봄날’처럼 아스라히 사라져간다. 각자 서로의 배우자들이 저지른 외도 때문에 만나게 되었던 <외출>의 두 주인공들의 관계는 이미 여러 한계들로 답답하게 막힌 출발선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따듯한 봄날에 갑작스럽게 내린 눈(April snow-외출의 영어 제목)같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그의 새 영화 <행복>의 모든 이야기는 영화의 첫 씬에서 영수(황정민)가 틀어놓은 라디오  DJ 멘트 안에 다 담겨있다. ‘처음 만난 날의 설레임으로 사랑한다면, 첫 출근하는 각오로 일을 한다면,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그렇다면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겠죠?’ 영화는 이 멘트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수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는 애인 수연으로부터 결별을 확인받고, 자신이 경영해 오던 클럽을 친구에게 팔아넘겨야하는 경제적 상태이며 간경변으로 인해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요양원 ‘희망의 집’에 도착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것도, 심지어 웃음마저도 잃은 영수는 요양원에서 폐가 사할밖에 기능을 못한다는 중증 폐질환자인 은희(임수정)를 만나면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영수보다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건강함이 그를 조금씩 물들이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은희의 제안에 영수가 한다발의 들꽃으로 응답함으로써 행복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행복이란 감정은 언제나 시간과 그것에 동반하는 변화들에 무력하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는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영수에게 주어진 소박한 행복은 그가 잃은 것들을 조금씩 회복해나가면서, 즉 수연이 그를 다시 욕망하기 시작하고 친구는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 결정적으로 그를 시골에 묶어두었던 병든 간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영수에게 고즈넉한 시골의 풍경은 한없이 지루한 것이 되어가고, 소박한 은희의 성품은 궁상맞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의 행복은 은희가 없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분수처럼 쏟아지던 행복의 근원이었던 은희가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면서, 그는 자기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함께하기를 갈구하는 은희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고 싶은 영수가 그녀에게 들려줄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인 것이다.


감독은 이 작품에서 ‘행복’에 대한 아주 오래된 우화 ‘파랑새 이야기’를 현대적 멜로드라마로 재해석한다. 행복을 꿈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영수의 눈길은 언제나 자기가 있지 않는 곳을 향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보려하지 않는 이는 끝없는 결핍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결핍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것 같은 행복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후반부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마련해야 하는 노후자금 ‘4억 7천’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하찮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없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무시하고 쉽게 스쳐지나가 버리며 행복의 순간들을 끝없이 유보해버리는 것. 영수가 은희를 떠나서 추구하는 삶은 고작 그런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로 포장된 허상들을 추구하기 위해 초래된 지금의 고통을 술과 담배와 같은 말초적인 자극들로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현대인의 삶이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도저히 몸을 빼낼 수도, 달음박질을 멈출 수도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같은 삶으로 돌아간 영수가 행복과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은희가 그보다는 조금 더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더 현명하거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죽음 때문에 살아있는 순간들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행복으로 더 멀어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행복은 어쩌면 그것에 무심할수록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실천하기는 힘든 행복의 아이러니가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분화된 공간 안에서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연애를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통해 자아는 어떤 욕망이 충족되기를 원하고 그것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추동해나가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유머러스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사랑 안에서 진동하던 감정의 울림들이 삶으로 더 많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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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3 23:17

    옹~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줄 위에서 2번째.. '더 많은 유머러스해졌지만' '더 많이 유머러스해졌지만'의 오타인 것 같아요 :)

    참.. 그런 것 같아요.. '팔월의 크리스마스'랑 '봄날은 간다'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외출>이후는 보기가 싫어서 안 보고 있어요;;

2007/07/23 - [드라마/한국 드라마] - 남장 여자가 매혹적인 이유-<커피 프린스1호점>

드라마는 이래서 참 성가시다.
드라마 중도에 '어, 이 드라마 꽤 좋은데?' '꽤 재미있는데?'라며 칭찬을 할라치면,
어느 순간 나의 호감에 제대로 뒤통수를 때리는 '배신'의 행보를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이 나기 전에는 함부로 무슨 드라마도 칭찬하기/비판하기가 어렵다.
지난 번 한껏 칭찬을 했었는데, 이렇게 분개하며 또 글을 써야하고.

분명 <커피프린스>는 미덕이 많은 드라마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예쁜 화면과 신선한 백뮤직을 선사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은찬이라는 '여성성'이 담보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의
사랑의 성취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게 다이다.
그 정도 가지고 '웰메이드'라고 하기엔, 아직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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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여자' 모티프의 매력을 얘기하면서
점쳤던 바와 같이 이 드라마는 그 순서를 지키긴 지켰다.
'사랑을 먼저 깨닫기(동성이더라도)-그 순간 서로가 이성임이 밝혀지기'
그러나 이 단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질질 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가 간 길은 동성애에 대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물론 저러한 전개 '룰' 자체가 이미 보수성을 지닌 것이었음은
알고 있었다.
이성애주의적이고 일대일의 배타적 관계, 영원한 사랑...
그런 길로 갈 것이 뻔함에도,
그러한 한계를 지님에도,
이 드라마가 저 과정을 거치기 위해
동성애를, 사랑을, 얼마나 새롭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보'의 길로 이끌어갈까
최초의 '여성 드라마 PD'가 만든다는 이 드라마에 대해
내심 기대를 버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내 기대를 무참히 깨는 쪽으로 흘러갔다.


한결이 은찬이라는 동성을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신경정신과를 찾아간다.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그 의사는 '돌팔이' 의사처럼 묘사됐다.
수전증이 있고, 추접스럽게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거리며
그의 상태와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듣기는 커녕
이 비정상적인 '병자'를 말초적 호기심의 대상처럼 바라본다.
그리고는 약을 처방해주며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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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것인가?
동성애를 느낀 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면
일단은 병자로 취급해서, 약을 통해 그 '병증'을 '고치도록' 유도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신경정신과 의사들에 대한 '오나전 실망'이고
(그러나,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렇지 않을테니, 이 드라마는 정말 '너무한 것'이다.


동성애라는 게 세상에 없는 일인가?
동성애자가 병자인가?
어떻게 'n개의 성'이 사는 이 세상에서
이 '웰 메이드' 드라마는 이따위로밖에 동성애를 취급하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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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이러한 폭력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결이 지리멸렬한(이 지리멸렬함은 뒤에 또 얘기하자)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의 시간을 거쳐 은찬에게
"나는 네가 좋아. 네가 남자든 외계인이든."
이라고 '커밍아웃'을 했을 때,
이제 남은 일은 "근데 어쩌지, 나, 여자인데."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 한 사람이 동성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굳게 믿고 있던 그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갈등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 이제 사랑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것은 물론 '그(녀)애자'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서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현재 사귀는 애인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일단은 그가 '고민'하는 과정은
그 한사람에게라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어렵게 동성애를 인정한 한 사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은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랬을 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옳다구나~하며 이성이라는 그 사람과
돌연 더 해피해질까?

글쎄..나라면 다시 헷갈릴 것 같다.

그가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
동성인 그 사람을 사랑함을 인정했다면,
그가 이성임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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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성애자일까, 동성애자일까?
그 사람이 동성이라서 사랑한 것일까,
이성이길 바라면서도 어쩔수 없이 동성임에도 사랑한 것일까?
이전에 그사람이 동성이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 만큼이나
그 사람이 이성이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도
똑같이 고민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새로움', '진보성'이었다.

결국엔 자신이 이성애자이며
사랑하는 상대방이 이성이라는 사실에 더 마음이 편해진다 하더라도
위의 과정을 충실하게 그린다면
조금은 동성애가 무게있게 다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어렵게 '커밍아웃'을 하자마자
이성임을 알게 되고,
그러자마자 한결은 '넌 어떻게 나를 속였냐?' 하나에만 매달려 화를 낸다.
속인것, 당연히 화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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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 과정때문에도 이 드라마에 왕짜증이 났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동성이라고 오해해서 힘들어한다.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럴 때 사실은 이성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물어보나 아닌가? 당근, 사실을 밝혀야지.

근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은찬은 한결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숨긴다.
그가 '네가 남자라도 네가 좋아'란 말을 할 때까지.
아무리 '테스트 관문'(이라고 내가 한 말)이지만, 좀 너무하지 않나?
테스트는 스토리가 해야지, 주인공이 해선 안됐다.

주인공이 아닌 스토리가 테스트를 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하면,
은찬은 둘 중 하나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결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자신이 남자라서 괴로워하는 걸 모르든가,
아니면 자신이 한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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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둘을 다 아는 은찬이 자신이 여자임을 속인다는 건
영악한 '선수' 여성이 남자를 테스트하는 과정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것도 6회말부터 11회 중반까지..주인공이 그렇게 오래 저 상태로 테스트하고 있는 건
정말이지 너무했다.

그러니 뒤늦게 사실을 알게된 한결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긴 하다.
그러나 속았다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도
동성애는 더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동성애자라고 인정한 순간 상대방이 이성임을 알게 됐을 때
한결이 다시 동성애를 포기(?)하는 게 조금은 혼란스러웠어야 한다.
그 과정이 진정성을 획득했어야 한다.

그러나 속였다는 사실에 대해 용서하자마자
왜 속였는지를 '이해'하자마자
한결이 하는 이 대사는
마지막으로 동성애와 동성애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고은찬, 네가 여자라서 좋다!"
OT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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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만화에 가깝다.
이야기 구성이나 캐릭터들도
내가 중고딩때 즐겨본 순정만화에서 본듯한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만화 못지않은 아름답고 흥겨운 연출로 이끌어 갔다는 점이
이 드라마로 하여금 많은 '팬'을 얻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드라마라면, 만화가 아니라면,
세상에 대한, 사랑에 대한 통찰만큼은 중고딩 수준 이상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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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2007/08/31 23:19

    오~ 이런 점이 있었군요! 제 이반 친구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보았을지 궁금하네요 ^^

  2. 2007/08/31 23:21

    근디;;; 태그가 없는 것 같은데요? 태그 달아주삼 :)

  3. 보다가 만... 2007/09/02 16:38

    재밌을 것같아서 보다가 중간에 시간이 없어서 못 보았는데,
    다시 시간이 생겼을 때도 안보게 되었던 이유가
    은찬양이 넘 질질 울어대는 바람에 생짜증이 나더이다.
    좀 더 쿨하고 당찬 캐릭터를 기대했는데 멜로드라마 비련의 여주인공보다 더 별것도 아닌 이유로 어찌나 우시던지....
    이 글을 읽으니 참고 보았으면 더 험한 꼴 보았을 뻔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4. 맞아요. 정말 잘 스셨네요.

    저도 뒤로 갈수록 너무 이야기는 궁해지고
    은찬이는 순진한 척 하며 상대방 염장지르는 선수라서 싫어지더군요.

    더구나 한회당 10분 이상은 나오는 그 야동 비슷한 상상씬은..-_-;;

    그나저나 공유 어깨 무지하게 넓네요ㅋㅋㅋ

  5. 달님 2008/11/01 00:17

    그래도 원작에 비하면 너무나 잘 만든겁니다. 그 원작자가 극본을 다시 썼어요. 그러니,내용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소설이 궁금해 읽으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는데, 그작가 정말 심하게 표절을 했더군요. 경성애사에서 태백산맥을. 또 몇 작품이 표절시비에 잡히는걸 기사에서도 보고 직접 확인 했습니다. 동기를 차용 한다는 것과, 표절한다는건 아주 다릅니다. 작가의 자존심이 없는 거지요. 이윤정 피디님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가 저만한 종합 예술품을 만들긴 쉽지 않지요.여성비하가 아니라 체력 때문이지요. 모든 예술이 기본이 힘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허접한 소견이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그냥 이런 생각을 가진이가 있구나...하고 지나가 주세요.^*^

    • BlogIcon coolya 2008/11/03 19:34

      네~(또 찾아주셨군요~!^^)저도 이윤정 피디는 <태릉선수촌>때부터 주목했고, 앞으로 더 대단한 연출가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커피프린스1호점>의 지나친 인기때문에, 오히려 그분의 '성장'이 여기서 멈춰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지요. 제글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정치적 올바름'이 좀더 철저해진다면, 여성 드라마연출가로서 더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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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여름이면 떠올려지는 가객 '쿨cool'. 정말 이해하기 힘들게 롱런했던 그룹이다.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여름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해변의 여인'. 정말 신나는 노래이지만, 가사를 유심히 듣다보면, 신나는 보컬, 리듬과는 달리 꽤나 꿀꿀한 스토리, 복잡한 구성으로 놀라게 된다.


해변의 여인
                                                작사:이승호 / 작,편곡:윤일상


우선 제목부터 조금은 야리꾸리한 느낌도 든다. 거성님의 '바다의 왕자', 그리고 이를 패러디(?)리메이크(?)한 '바다의 공주'등도 있지만, '해변의 여인'하면 뭔가 언덕 위의 하얀집이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좀 더 이 제목을 노려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바다의 왕자'라고 하면 왕자가 바다를 소유한 느낌이지만, 바다의 공주나 '해변의 여인'이라고 하면 지형지물에 공주나 여인이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가부장제 문화 속에 굳어진 '어감'일까? 즉 바다의 왕자면, 그야말로 바다의 지배자인 의미지만, 바다의 공주나 '해변의 여인'이라고 하면 바다에 놀러온 공주나, 해변에서 어슬렁대는 여인이 떠오른다는 의미. 나만 이런가? 어찌됬든 잡설은 그만하고 본설로 넘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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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유리라는 가객이 읊는다.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유리씨는 튜닝(?) 전이었다...)

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안에만 쳐박혀 있어
안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 버려 (유리)

다짜고짜! 버럭! '이게 뭐야'냐는 거다. 이 여름에 왜 방안에만 있냐는 것. 그냥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것. 괜시리 제목에서부터 딴지를 걸고 있지만, 이 또한 뭔가 여-남 권력관계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왜 어디를 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인 것인가. 왜 이 유리씨는 자기가 어딜가자고 하지 않고, 남자가 아무데도 안 데리고 가니까 '버럭'만 하는 것인가. 이 유리씨의 유일한 무기는 '버럭, 헤어져'이다.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능동적 노력이 아니라, 이 관계가 아니라면 다른 관계를 찾겠다는 '단칼'만이 무기인 것. 얼마나 슬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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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도 죄송. 잘 생겼다고 단언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룹 내에서 상대적 우월성을 과시했던 이재훈. 필자가 잘 생긴 남자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고로 이 사진 채택. 필자의 중학교 선배인 이재훈씨! )

내품에서 흘린 눈물 너만큼 나 힘이 들었어 잃어버린 너의 미소 찾을 수 없을까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사랑을 위한 여행을 하자 바닷가로∼ (이재훈)

근데 또 이게 통한다. 이재훈이라는 가객이 곧 이어서 읊는다,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그리고 여자가 원했던 '방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 여성이 수동적으로 남성을 조종해서 원했던 것을 얻는 것이고 남성은 여성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미소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고하는 것이다.

빨리 떠나자 야이야야야 바다로
그 동안의 아픔들 그속에 모두 버리게
이게 아니야 우린 사랑했잖아
이젠 다시 눈물 없는 사랑으로 만들어봐 후∼ (유리& 재훈)

버럭! 후에 '빨리' 떠나는 그들. 아픔을 모두 버리자고, 눈물 없는 사랑으로 만들자고 합창하는 그들. 근데 과연 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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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김성수.. 이분 '섹시'컨셉이라고 하시는데.. 별 사진이 다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바닷가를 걷고 난 쓸쓸히 바닷가를 혼자 걸어 갈 때
앗! 나처럼 혼자 걷는 여잘 보게 됐고 난 그 뒤로 하염없이 쫓아가게 됐어 (김성수)

어딜 갔어 이 밤중에 도대체가 이해가 안돼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버려 두니 (유리)


돌연 김성수의 랩이 나와서, 이것은 제3자인가 착각하기 쉬운데 그 다음에 유리의 가사까지보면 이 랩은 앞서 이재훈의 노래가 유리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이라면 김성수의 랩은 남성의 심정을 독백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뭔일이 있었는가. 우린 모른다. 갑자기 남자는 쓸쓸히 혼자 걸었다. 그러니 여자는 이 밤중에 남자가 어딜 갔는지 '도대체가 이해가 안돼'고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버려'둔 남자를 원망한다.

자, 맘대로 상상해보자. 남자는 여자를 위해 먼 바다까지 여행을 왔다. 피곤하고 지쳤을테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둘 중 누군가 약간의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 짜증은 순탄치 못한 여행전 감정들을 상대에게 증폭시켰을테고 둘은 화가 났을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화성 남자, 금성 여자'식의 분석에 도움을 얻자면 남자는 화가 나면 혼자있고 싶어하고, 여자는 대화로 풀려한다고 한다. 남자는 버럭 화가나서 박차고 나갔다. 여자는 더욱 화가 난다. 아니, 화났으면 말로 풀어야지 여기까지 와서 나를 혼자 내버려두다니! 그 사람한테 나는 이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남자는 쏘다니며 쓸쓸해진다. 화가 나서 나왔지만, 밤바다를 연인과 싸우고 혼자 걷는다는 것은 참 낭만적인 일이고 이에 스스로 취하면 괜히 쓸쓸한척 폼을 잡게 되는 것.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바에 따르면, 그렇게 행동하면 또 그렇게 마음이 가는 법. 정말 쓸쓸해지는데, 왠걸! 혼자 걷는 여자가 한적한 밤바다에 내 앞에 있었던 것. 이야... 이럴때 남성의 마음은 무엇일까. 좋게 말하면 낭만인 것이고, 분명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뒷모습은) 예뻤다는 것...

해변에서 만난 여인 많은 예길 들려 주었지 잃어버린 사랑으로 여기에 왔다고
돌아가면 나 역시도 혼자 될거라고 새벽이 오는 바다에 앉아 얘기했지 (재훈)

그 낭만에 취해 어찌어찌 붙잡아 말을 걸어보니,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사랑을 잃고 바다에 왔노라고. 캬.. 밤바다에 이런 고백을 들으니, 달이 비추고 별이 깜빡이고, 어쩌면 작은 모닥불 앞에서 재훈이라는 가객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면 나 역시도 혼자 될'거라고 말하고 만다. 새벽이 오는 바다에 앉아서 말이다. 새벽은 어디서 오는가.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 어디선가? 새벽은 어디에서도 오지만, 어디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는지가 중요하다. 그 중 대표적 '상투적 공간'이 바로 바다. 새벽에 태양이 떠오르며 형형색색 변하는 바다와 하늘. 검은색에서 희뿌연 회색에서 보라, 자주, 적청, 희끄무레하게 푸릏게 되다가, 마침내 붉은 태양이 점점 노랗게 붉은 색을 흡수하며 떠오를 때, 옆에 앉아있던 여인. 함께 이별의 '기억'을 겪고, 신새벽의 태양을 함께 본 것. 캬 태양은 다시 뜬다 이거다.

해변의 여인 야이야야야 그녀와 떠오르는 태양을 우리는 함께 본거야
기다리지마 이제서야 만났어 이제 다시 이별없는 사랑으로 만들거야 후∼∼ (재훈&유리)

그런데 한편, 우리의 유리라는 이름의 가객은 분한 맘에 맥주 한캔 따고 소주 반병 비우고 잠이 들고 말았던가.. 뭐하고 있었는가. 갑자기 클라이맥스라고 맞지도 않는 가사를 함께 부르는 이유는 뭘까.. 대미는 장식된다.

해변의 여인 나와 함께 다시 돌아가는 길에 보았지
예전에 그녀 멋진 자동차에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걸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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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느낌?)

재훈이라는 가객 속으로 희희낙낙 '해변의 여인'과 돌아가는 길에 목도한다. '예전에 그녀' 벌써 멋진 자동차&남자를 꽤찬 것을. 그러니 앞서 클라이맥스에 '기다리지마 이제서야 만났어 이제 다시 이별없는 사랑으로 만들거야 후∼∼'는 유리라는 가객에게도 해당되었던 것!

아. 이 얼마나 해피엔딩인가. 그리고 생산적 발전적인가. 2+2=4. 그리고 재훈은 뒤태든 앞태든 분명 꽤나 괜찮을 '해변의 여인'을 만났고, 유리는 멋진 자동차를 뽐내는 남자를 얻었다. 그래, 이런게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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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짐씨네 2007/08/29 08:18

    귀여워...해석과 사진 설명. 이 노래의 여름 휴가 판타지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지만 제대로 실현된 적이 별로 없는...실로 판타지인 듯. 우후~ 환상이든 현실이든 여름이 홀딱 다 가버리고 말았군.

  2. 2007/08/29 09:33

    아.. 그르게요;; 내년 여름을 또 기대해봅니다(?)
    그나저나 지구 온난화로 2090년경되면 겨울이 없어진다는데..
    요즘 기후보면 완전 코스타리카에요 스콜! 우기! 헐.. 좋은데! ㅋ;;;

  3. BlogIcon coolya 2007/09/04 09:38

    제가 깜빡하고 <시 천천히 읽기> 폴더를 빼먹었네요..대중음악과 가까운 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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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피서하면 바다이고, 바다하면 사랑이다. 곧 피서는 사랑! 아직 20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누구나 그러한지, 바다라는 곳은 미지의 사람과 낭만적인 만남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 여름의 그룹 '쿨'이라는 가객이 노래했던 것처럼!

이런 피서, 바다, 사랑의 세 키워드를 만족시키는 시로는 올해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의 표제작인 강기원의 <바다로 가득 찬 책>을 들 수 있다.



바다로 가득 찬 책*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첫 연부터 독자로 하여금 설레게 만든다.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이 문장에서 시가 시작된다. 사람/사랑=책=바다 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단순히 사람-책 또는 사람-바다라는 단순한 유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세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고정되지 않으며 풍부한 의미를 들어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성적인 비유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바다-책 이라는 이미지는 수동적이며 '여성적'이다. 그러나 시가 전개되어가면서 그러한 성적 구분은 경계가 지워진다. '범람하는 물'을 내가 '쓰다듬'으면 내가 깍이고 내 '틈 속으로' '너의 체온'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여-남이라는 구분이 아니라, 네가 여자였다가 내가 또 여성이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너무 쉽게 '사랑'을 완전한 합일이라고 노래하지는 않는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라는 시인의 언어는 얼마나 간절한가. 가 닿을 수 없는 타자. 문자라는 표면에서 두레박을 내려 길어올리는 것은 몇줌의 의미 뿐. 우리는 책=바다=사랑이라는 연결 속에서, 책/바다/사랑의 '해연'에 가닿으려는 시인(사람이자 문자로 작업하는 기능공인)의 절망을 엿본다. 이는 바꿔말하면, 이 시(문자/책)를 읽는 독자의 절망이기도 하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이미지의 놀라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는 간신히 ‘대륙붕’에만 도달할 뿐. 타자는 끝없이 깊다. 그럼에도 그러한 타자의 ‘부력’은 한없이 타자의 그 깊이로 자아를 끌어당긴다. 그러한 타자는 바다 속 숨겨져 있는 산호초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편안한 진동으로 화자에게 쉴 곳을 주기도 한다. 타자의 깊은 속에는 마주대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도사리기도 하지만 (해골들의 헤버러진 입) 그 말할 수 없음의 지점에도, 그 균열의 지점에도, 바다는 타자는 끊임없이 파도치며 부드럽게 화자에게 어떠한 파장을 보낸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의 끈이고 관계이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일 터이다. 또 달리보면 그것을 우리가 '책'또는 '의미'의 전달 내지는 이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화자는 그 진앙지, 그 ‘너울거림’의 진앙지를 찾아 ‘너=바다’라는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끝내 보지 못한다. 그러나 또 본다,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를. 타자는 기실 ‘너’ 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 속에도 있었던 것. 혹은 ‘너’ 속의 ‘나’가 만들어 내는 것.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라는 사랑에 대한 아름답지만 또 환상적인. 그래서 공허하고 덧없는 ‘환幻’이지만 그래서 더 애달픈. 그것이 ‘너/타자’와의 사랑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로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를 보고 있지만, 그러한 환상을 그래도, 같이 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사랑은 곧 모든 관계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사람/사랑=책=바다. 시인은 바다로 가득 찬 책을 열어보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홑겹의 환어 지느러미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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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3- 김윤아 ‘봄날은 간다’

앞서 살펴본 영화 ‘봄날은 간다’의 포스터, 김억 ‘봄은 간다’와 함께 울려퍼지는 노래는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쓸쓸함의 고백으로 시작하고 싶다. 4년 이상 사귄 연인과 관계를 되돌아보다가, 그녀가 보냈던 메일들 함께 썼던 일기들을 다시 들춰보았다. 그녀의 열정적인 고백들, 외로움과 그리움과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 특히 그녀는 진로 선택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고 그 힘듬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금보다는 다소 어린 말투로 한자한자 적혀있는 편지들을 읽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그녀를 사랑해주었는지를 떠올려보며, 쓸쓸해진다.

3년여 전쯤의 글들을 보다가,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다시 들어본다.

봄날은 간다 -김윤아 작사, 노래 / matsutoya yumi 작곡, 조성우 편곡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와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눈을 감는 행위는, 우리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의 차단을 의미하며, 이로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게 한다. ‘마음이 저려 오는 건’ ‘사람도/피고 지는 꽃처럼/아름다와서 슬프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이다. 머물 수 없음에, 꽃처럼 피고 진다는 것이, 슬프고 또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이 ‘무심’하게 흘러간다는 것이, 슬프고, 또 그래서 또 아름답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그녀와의 기억이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이, 이제 ‘추억’에 그친다는 것이, 사랑은 끝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사랑 자체도 환상이며 대문자 ‘여성’ ‘사랑’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즉 내 안의 단절과 균열과 욕망의 원인인 대상‘a'로서의 ’여성‘ ’사랑‘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착각, 환상이라는 것을.. 결국 내 외부에 나를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을 횡단하고 자기 자신의 균열, 단절, 욕망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 이 때문에 사랑의 한 시기가 끝났을 때, ’봄날‘이 갈 때, 우리가 조금씩은 쓸쓸해지는 것. 그럼에도 그 환상에의, 그 합일감에의 추억이,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 같기에 쓸쓸함을 넘어서 ’아련히 마음‘ 아파지는 것.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같은 것들

어쩌면 또 봄이 오고, 또 환상적인 합일감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 환상을 믿는 순간만은 한없이 행복함으로.. 그래도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알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지나갈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결국은 단독자임을.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던 여인을 결혼식에서 ‘납치’해서 버스를 타고 그 버스가 출발하던 순간 더스틴 호프만의 허탈한 표정을 우리는 기억한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와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같은 것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와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문득 돌아보면, 봄날은 가 있다. 봄과 여름 사이에 어떤 단절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봄이고, 또 여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고 또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혹 이별했다고 해서, 갑자기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닐 터이고, 계속 사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6월부터 여름인 것도 아니고 5월 말까지만 봄인 것도 아니 듯이.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삶은 지속되고, 환상을 횡단하고 강해진 나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환상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제 ‘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내 삶의 봄날은 가지만, 혹은 영영 갔지만, 아직도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이에 진정 사랑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 예전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느끼고 있는 사랑의 압도적 경험은, 예전 사랑의 기억들을 눈부신 낮에 비껴있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한다. 김윤아의 이 노래가 쓸쓸한 것은, ‘봄날은 가고 있다’나 ‘봄날이 간다’나 ‘봄날이 갔다’가 아니라 ‘봄날은 간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새로운 사랑을 하기 전, 또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깨달은 성숙한 화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흔히 열병과 같은 20대와 성숙의 기점에 서 있는 30대를 구분하고는 한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김윤아의 노래, 김억의 시, ‘봄날은 간다’ 영화 포스터와 함께 울리는 까닭은 여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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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컷트머리로 복귀한 윤은혜가 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커피 프린스1호점>에서 고은찬(윤은혜 분)을 남자로 오해한 최한결(공유 분)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결말 뿐 아니라 그 과정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드라마이다.

이것이 항상 딜레마다.
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 멜로형 드라마인데도,
분명 어떤 드라마는 꽂히고, 어떤 드라마는 안꽂힌다는 것.
어떤 드라마는 뜨고, 어떤 드라마는 안뜬다는 것.
그러니 '뻔한' 스토리로 승부하는 게 안전할지, 위험할지
시놉시스, 기획의도 같은 것만 봐서는 참으로 짐작하기 어렵다.

굳이 차이를 들자면,
언젠가 내가 쓴 글에 나오듯, 같은 스토리라인이더라도 배치와 분량의 분배가 문제가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캐릭터의 새로움, 현실성, 매력과 같은 것,
그 다음으로는, 연출가의 연출력(배경음악 등까지 포함한)
등이 되겠다.
그 뒤에 따르는 요소로는 (그제서야) 스타급 배우의 출연, 막대한 제작비 등일 거고.

어쨌거나, 이런 점에서 볼때
<커피프린스>는 일단 캐릭터와 연출력 쪽에서 좋은 점수를 거두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스토리라인은 이제 겨우 6회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고.
(스타급 배우나 제작비는 별로 안중요함은 이 드라마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이 드라마에서 특이한 점은
윤은혜라는 여주인공이 '남장 여자'로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모두에게 남자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남자주인공에게 그렇게 보임으로써
세상의 일정 지역(남주인공인 한결의 주위)에서는 남자로,
또 다른 곳(다른 남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한성의 주위)에서는 여자로 역할하며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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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 여자는 고전소설에서도 종종 사용된 모티프라 한다.
그런데 그 시절의 여성이 남장을 한 이유는 단 한가지,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전쟁터에서 남성들보다 뛰어난 무공으로 적군을 제압하고 공훈을 세워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그야말로 허황된 캐릭터였다.

그리고 개화기의 대중 장르라 할 수 있는 신소설에서도
남장 여자 모티프는 자주 등장한다.
이때는 좀 달라졌는데, 여자의 모습으로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므로
(신소설에는 온갖 세상이 '남자'라는 악들로 우글거린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런 위협(특히나 성적 위협)을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다.


요즘도 순정만화를 보면 남장 여자 주인공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나도 '좋아라~'하며 보곤 했던 스토리들이다.
그러니 <커피프린스>를 보면서 흥미를 느낀 것은
묘한 순정만화 탐독시절의 향수와 함께 일종의 '조건반사'같은 것이었다.

그럼 '언니'들은 왜 남장여자 스토리에 '조건반사적으로' 열광할까?
기본적으로 '남장'을 한 윤은혜가 진짜 소년같은
귀여움과, 강인함, 생활력 등을 일단 갖췄다는 점이 일차적 '매력'의 요소일 것이다.
(그녀는 외모도 귀엽고, 자기보다 30센티미터는 더 커보이는 남자 한결을 번쩍 업는 '괴력'의 소유자이며, 새벽우유배달부터 밤의 야식배달까지 안하는 알바가 없고, 먹을 것만보면 사족을 못쓰는 '위대'한 위인이며, 수백미터 너머의 냄새도 다 구별하는 '개코'의 소유자로서 원두구별능력의 일인자로서의 자질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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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주는 쾌감은 크게 두 차원이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변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의 진정성 테스트 관문.


먼저 변신 스토리는, 역시 고전적인 '매혹적 스토리'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미녀와 야수>, <개구리왕자>류와 같이,
야수나 개구리 등이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 <미운오리새끼>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로맨틱 코미디물 사상 최대 관객을 모았다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의 변신에 열광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못나고 보잘것 없는 줄 알았던 인물이 어느날 '제대로'변신해서
최고의 미모와 행복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는 왜 듣고 들어도 즐거운지...
인간의 변하고 싶은, 그러나 변화가 쉽지않은 현실로부터
한껏 도피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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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프린스>에서도 은찬은 지금도 가끔 (예쁜 여자로)'변신'한다.
자신의 적성에 안맞는 옆트임이 아주 심한 스커트를 입고 와인바에서 홀서빙을 하느라
늘씬한 각선미를 선보이기도 하고,
한성(이선균 분)의 전시회 초대에 응하느라 한성이 사준 옷, 구두, 가발로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남장 여자'라는 기본틀 안에서도 시청자들에게 때때로 눈요깃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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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 한결이 은찬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한결 앞에서도 완전 여자로 변신해 주실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니들은 흐뭇, 므흣하다.^^


또 하나인 사랑의 진정성 테스트 관문이란, 바로 저 대목
"한결이 은찬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다"에 있다.
앞으로 이 대목의 스토리라인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나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만약 내 예측이 틀린다면, 그것은 내 '실수'가 아니라 그 드라마의 '실수'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스토리 전개 순서는 이래야 '정석'이다.

1. 한결이 은찬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2. 그러나 은찬이 남자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인가 하고 고민, 방황한다.
3. 그럼에도 은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저버릴 수가 없으므로,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는 한이 있어도 은찬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4. 은찬은 한결의 고백에 자신이 여자임을 밝혀야하는지 고민하는 찰나,
5. 뜻하지 않은 주위 인물이나 사건에 의해 은찬이 여자임이 발각되고
6.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한결
7. 둘 사이의 엇갈림이 잠시
8. 그 즈음 등장하는 사랑의 삼각형: 한성이 은찬에게 역시 대쉬하기
9. 화난 마음을 다 풀지도 못한 채, 또 한성과 은찬의 관계를 질투하는 한결
10. 그러나 은찬 역시 이미 마음은 한결에게로....


아..정말 결말까지 다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10번까지 다 올 것 없이 '남장여자'모티프에서 중요한 대목은
바로 3번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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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은찬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테스트에서
당당히 '합격'의 도장을 받는 순간을 3번까지가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겨울연가>에서
준상과 유진이, '첫사랑이 아님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테스트에서
합격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두 테스트가 대중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그 테스트에 내재된 '보수적' 결론때문이다.

'남자임에도 은찬이를 사랑해', '네가 나의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난 널 사랑해'
라는 인정을 하는 순간,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래? 오, 훌륭하군. 날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 좋아 합격.
근데 놀라운 사실 하나 가르쳐 줄까? 나, 사실은 여자야!(나, 사실은 네 첫사랑이야!) 짜자잔~"
이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 대목까지 갈 동안의
주인공들의 고민과 방황이란 다 '허위'이다.
이 '거짓된'(곧 괜한 고민, 방황이었음이 밝혀질) 고통의 시간은
진실을 알고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고통이다.
"쟤가 저렇게 혼자 끙끙 앓고 있지만, 사실, 걱정 할 필요없는데-"
하며 그 주인공의 '무지', '어리석음'을 즐기게 된다.
이때 수용자들이 갖게 되는 '우월감', '전지적 존재'라는 착각.
그리고 '어리석은' 주인공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였을때 주어지는 보상으로서의
'보수적'이고 '안전한' 진실.
또 여성 수용자들에게 선사하는
"저렇게 멋진 남자(한결)도, 여자를 '여자다움', '외모'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헛된 희망과 용기.
이런 것들이 드라마를 보는 또 하나의 쾌감을 제공한다.


자...오늘 하게 될 <커피프린스 1호점>의 제7회는
예고로 보아하니, 1번에서 2번 단계쯤 되는 듯하다.
대중들이 가장 즐거워하며 즐길 수 있는 단계이다.
여기서부터 5번단계까지가(즉 이번주와 다음주 정도)
이 드라마의 시청률을 30프로대로 진입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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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ine 2007/08/04 08:45

    아핫 언니 역시 제가 쓰고 싶어했던 드라마에 대해 쓰셨군요. 각 나라 문학 전통에 드러난 남장여자에 모티프의 차이도 흥미롭네요. 전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장여자들과 비교했는데요.

  2. BlogIcon 2007/08/29 21:55

    오. 그러고보니, 그 똑똑하고 멋진 거시기 그 누구냐, 그, 살만 떼가고 피나오면 넌 죽었어 그 분! 흠.. 남장여자.... 저도 그런거(?) 좋아해요. 저는 게이도 좋아하는 것 같고.. 뭔가 남성성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아요. 심리검사 결과도 여성성이 강하다고 그러던데..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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