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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낫데어

2008/03/16 23:18 | Posted by 짐씨네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여섯 개의 얼굴, 하나의 삶, 자아와 분리되고 타자와 하나 되는 밥 딜런의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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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실존 인물들의 삶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고 스크린 위의 빛으로 영사되었지만 <아임 낫 데어>에서 토드 헤인즈가 살려낸 밥 딜런의 생애만큼 신선하고 독특한 화법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 것이다. 그는 밥 딜런의 생을 여섯 얼굴을 통해 포착하는데 그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거나 감춰진 진실들을 들춰내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데이빗 보위를 모델로 삼아 글램록 시대를 재구성해냈던 <벨벳 골드마인>이 걸었던, 실제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틱하고 패셔너블한 허구와도 조금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감독은 여섯 개의 페르소나를 통해 밥 딜런이 스쳐지나간 인생의 여섯 국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모두 밥 딜런들이며 밥 딜런에게 덧씌워진 가면들이기도 하고 밥 딜런이 아닌 다른 누군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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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에게 저항음악으로서 포크음악을 가능하게 해준 뿌리와 같은 인물인 우디 거스리를 자신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흑인 소년(마커스 칼 프랭클린)은 우디 거스리에게 매료되어 미네소타에서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밥 딜런의 여정을 대신 걷는다. 밥 딜런이 존경했던 시인 아르튀르 랭보(벤 위쇼)는  그 대신 심문대에 앉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그의 내면을 읊조린다. 포크 가수에서 목사가 된 잭 롤린스(크리스천 베일)는 70년대 후반 급작스럽게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종교인이 되어버린 밥 딜런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잭 롤린스를 연기하는 배우로 등장하는 로비 클락(히스 레저)은 주로 밥 딜런의 사생활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결혼 그리고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재연한다. 다른 성별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을 시청각적으로 가장 흡사하게 재연했다면 온갖 상찬을 받은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주드는 1965년 여름 뉴포트 포크 페스티발을 기점으로 포크에서 락으로 전향한 시기의 딜런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리차드 기어)는 밥 딜런이 흠모했던 인물이자 샘 페킨파가 감독하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 <관계의 종말 (Pat Garrett & Billy the Kid)>(1973) 속 주인공 -밥 딜런은 빌리 더 키드의 부하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이자 73년 교통사고 이후 은둔생활을 했던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들이 밥 딜런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을 채우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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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밥 딜런에 대한 애정을 겸비하고 적절한 정보를 숙지하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만 느슨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여섯 주인공의 이야기를 인과성이나 시간성에 근거하지 않은, 심리적인 리듬에 따라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여섯 페르소나의 편린들을 맞춰나가는 것이 관객에게는 다소 힘든 작업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밥 딜런의 팬이라면 130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을 충만하게 채우는 밥 딜런의 오리지널 곡과 새로운 목소리를 통해 재탄생한 그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질 것이다. 물론 딜런에 대한 애정과 상관없이 토드 헤인즈가 택한 천재적인 전기기술법을 감상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하나의 인간은 다양한 개체로 분열될 수 있고 동시에 각각의 개체들은 어떤 점에서는 연결된 유기적인 존재가 된다. 이 영화는 무수한 당신들의 존재로 채워지는 나와 여기로 채워지는 그곳, 그리고 존재하지 않음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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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네 커플의 사랑이야기 다룬 <내 사랑>과 <기다리다 미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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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워킹타이틀이 제작한 <러브 액츄얼리> 바이러스는 엄청났다. 이듬해 <새드무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 연말연시를 겨냥한 옴니버스영화 붐을 일으키더니, 올해도 종합 ‘러브 스토리’ 선물세트 두편을 탄생시켰다.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든 개기일식을 계기로 사랑을 찾거나 떠나보내거나 인정받거나 뒤늦게 발견하는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내 사랑>과 군대 간 남친과 기다리는 여친, 일명 ‘군화’와 ‘곰신’ 네 커플의 파란만장 730일을 다루는 <기다리다 미쳐>가 바로 그것이다. 두 영화는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루는 점에서, 딱 네 커플을 고른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랑이 애틋한 기다림과 연관되는 점에서 닮은꼴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이 글은 ‘무엇이, 무엇이 닮았을까’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었는데, 두 영화를 보고 난 뒤 게임의 규칙은 ‘다른 그림 찾기’로 바뀌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영화의 외양 속에 숨겨진, 사랑에 대한 다른 이해. 그것을 한번 찾아보려고 한다.


지고지순한 기다림 vs. 어쩌다보니 기다림

두편의 영화에서 사랑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테마는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내 사랑>은 달과 태양이 만나는 개기일식을 은유적으로 차용한다. 낮과 밤이라는 상반한 영역에 존재하던 하늘 위의 존재들이 120년 만에 만나는 숭고한 순간에 오랫동안 기다리고, 더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남녀가 만난다. 그 덕분에 이들의 만남에는 어쩐지 운명이니, 일생이니, 유일이니 하는 묵직하고도 경건한 수식어들이 들러붙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3년 전에 세상을 떠나버린 장난꾸러기 연인 주원(최강희)의 기억은 현재의 세진(감우성)의 삶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고, 신입생 때부터 좋아해왔던 선배 지우(정일우)를 따라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그를 해바라기하는 소현(이연희)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카피라이터 정석(류승룡)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무리 밀어내도 덤비는 수정(임정은)이 있고, 6년 전에 헤어진 연인의 전화 한통을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진만(엄태웅)도 있다.

반면 <기다리다 미쳐>는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그리고 그런 남성들을 애인으로 둔 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혹은 여러 번 경험해봤을 군입대가 기다림의 계기가 된다. 통과의례의 중요한 절차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워낙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운명이니 뭐 그런 말보다는 ‘너 고생 좀 하겠다’ 정도로 위로받는 수준에서 끝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절차를 거치면서 군대 안팎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상황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네 커플은 약동하는 젊음을 묶어둔 2년 동안 그런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6살 연상연하커플(장근석/손태영)은 나이의 벽과, 사회와 군대의 거리를 깊이 실감하고 거의 이별 직전까지 갔다가 해후하고,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던 닭살 CC(김산호/유인영)는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다. 원래 단순히 밴드 멤버였던 커플(장희진/데니안)은 ‘세상에서 가장 꼬시기 쉬운 게 군대 간 남자’라는 공식을 잘 살려 연인이 된다. 그리고 같은 집에 살던 날라리 커플(한여름/우승민)은 다소 시끌벅적하게 멤버 교체를 하면서 그냥 잘 산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오래 기다림의 미덕을 칭송한다. 그러나 <내 사랑>이 기다림 자체를 사랑의 순도와 등가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는 그것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한 가지일 수 있다고만 말한다. 그런 차이가 <내 사랑>의 모든 연인은 겉은 다르지만 실제로는 마치 한 종류의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의 연인들의 사랑이 좀더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번쯤 본 듯한 연애담을 말랑말랑한 클리셰에 녹여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이디를 바꿔가며 도배질하는 듯한 전자에 반해 이 사람 저 사람이 올린 듯한 글을 짜깁기한 후자가 좀더 재밌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일원화한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 점에서 좀더 매력적이다. 적어도 <기다리다 미쳐>는 기다림과 기다지 않음 사이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는 걸 알려준다. <내 사랑>에서 모든 기다림이 긍정적인 답변으로,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유일한 사랑으로 가치평가받는 것과 달리 <기다리다 미쳐>는 헤어져도 각자 웃으며 만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사랑을 보는 좀더 포용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섹스리스 천사들 vs. 몸이 먼저 가는 인간들






기다림과 사랑에 대한 등식을 보여주는 <내 사랑>보다 그 사이의 약간 복잡한 함수관계를 설정하는 <기다리다 미쳐>가 더 확실하게 갈라서는 지점은 바로 ‘섹스’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 사랑>에는 섹스가 없고, <기다리다 미쳐>에는 섹스가 있다. 그 때문에 전자는 판타지가 되고, 후자는 로맨틱코미디가 된다.

<내 사랑>에는 섹스신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그것은 있는데 없는 척 넘어가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순수한 사이들이라서 통 그럴 생각들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섹스를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세진과 주원이 지하철에서 타의로 부비부비하다가 얼굴이 빨개지는 정도다. 이외에는 각 커플의 뽀뽀-키스가 아니다- 정도가 <내 사랑>에 등장하는 육체적 관계의 전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귀여워, 귀여워”를 외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래가 관객의 정서를 대변한다기보다는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를 강요하는 캠페인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모두 다 육체적으로 끈적끈적하게 굴어야만 현실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가 날개없는 천사처럼 똑같이 동화에나 나와야 하는 수준의, 그리고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그런 무색무취의 섹스리스한 관계만을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이한 감독이 <연애소설>에서 그런 사랑을 선보였을 때는 나름의 동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어떤 남녀들의 특수한 삼각관계에만 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 속한 모든 커플이 ‘귀여운 사랑’만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좀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프리허그 운동가 진만의 ‘프리허그’가 공허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프리허그’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이는 분명 차가운 이 세상을 인간의 온도로 따듯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미있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진만의 방황이 왜 프리허그라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성의있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은 현실성 제로의 ‘귀여운 사랑’처럼 그저 안아주는 행위의 외양만을 모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기다리다 미쳐>에서 섹스는 사랑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섹스를 통해 사랑의 권력관계를 탐구한다느니 뭐 그런 심오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건 몰라요’라며 내숭을 떨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바람직한 섹스신은 남보람(장희진)이 서민철(데니안)을 유혹하기 위해 면회를 가는 장면에서 나온다. 남보람의 깜찍한 계획에 따라 서민철은 아직 마음이 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움직이는 대로 관계를 막 시작하려는 그 순간, 그녀는 콘돔없는 섹스를 살짝 거부한다. 결국 그녀가 준비한 콘돔을 찾느라 그냥 날이 새고 말지만, 안전한 섹스와 자신의 몸을 위해 당당히 요구하는 남보람은, 좀체로 한국의 주류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섹스가 원래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20대 여성으로 그려진다. 군대 간 애인 때문에 외로워하다가 ‘외로워서 섹스를 할 수도 있구나’ 깨닫게 되는 강진아(유인영)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섹스에 대한 욕구와 그 때문에 빚어진 결과- 짝사랑의 민망함과 파탄 난 연애- 를 자기비하나 자책으로 연결하지 않고 성장통으로 인정하며 훌쩍 자라는 모습은 어떤 ‘가장한’ 순수보다도 아름다워 보인다. 게다가 이전까지 한국영화에서 30대 커리어 여성에게만 한정되었던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그것에 대한 건강한 자기긍정이 20대 여성에게까지 확대된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관객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려면

이렇게 유사한 기획의도를 가진 두편의 영화가 현실감각을 상실한 판타지와 현실을 다소 과장한 로맨틱코미디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차이는 영화 내부에 자신이 다루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서 비롯한다. <내 사랑>의 엑스트라들은 주인공들의 사랑놀음에 동원된 방청객 역할을 충실히 한다. 같이 감탄하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귀여워해준다. 하지만 <기다리다 미쳐>의 엑스트라들은 약수터신에서 물 뜨러 온 아줌마 아저씨들이 가장 잘 보여주는 것처럼 ‘쟤들 뭐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세상도 그 사랑에 포옥 빠져서 같이 웃고 울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커플이라면 ‘염장질’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사랑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까지 헤아려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들끼리만 사랑하다 마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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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2006, Hyazgar / Desert Dream)

*경계가 보이지 않는 몽골의 자연 속에서 숨 쉬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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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모두들 점점 사막화되어가는 초원을 어떻게든 지켜보려는 헝가이(바트을지)의 노력이 무모하다고 여기고 더 이상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고 여겨 그곳을 떠나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여긴다. 마른 모래땅에 묘목을 심는 그의 행위는 자연에 대한 정복이나 개발과는 거리가 먼, 불가능한 믿음처럼 보인다. 이 고지식한 사내는 문제가 생긴 딸의 청력을 고치기 위해 울란바토르로 떠나자는 아내의 간청마저 뿌리치고 혼자 남는다. 이웃과 가족이 다 떠나버린 후 탈북자 모자 최순희(서정)과 창호(신동호)가 하룻밤 묵을 곳을 청하며 그의 움집 문을 두드린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딸의 자리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소년이, 그의 나무심기를 비난하던 아내의 자리에 묵묵히 일손을 돕는 여자가 들어선다. 그들이 청한 하룻밤은 소년이 떠나기를 거부하면서 하루 이틀 연장되고 사내와 모자는 천천히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그들이 같이 있는 모습은 하나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간다.


안과 밖이 분명하고, 오늘과 어제가 분명히 다른 도시의 삶에서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들의 동거가 자연스럽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몽고의 거대한 평원이라는 자연적 배경과 이방인을 쉽게 가족 안으로 들여놓는 그들의 습속 때문이기도 하다. 장률감독은 전작 <망종>에서 조선족 모자 최순희와 창호를 몽골 초원 위로 다시 한 번 소환한다. 중국의 소도시에서 철저하게 타자였던 조선족 최순희의 비참한 삶을 어떤 동정이나 위안의 제스처도 덧붙이지 않은, 너무나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내었던 감독의 태도는 <경계>에서도 유사하게 이어진다. 두만강을 건너며 가부장을 잃은 모자가 이년동안 걸었던 여정은 표정 잃은 여인과 소년의 얼굴 위로,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타인의 집이라도 안주하고자 하는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 함축적으로 전달된다. 최순희와 창호에게 인적 없는 광활한 초원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 아니라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간이며, 말이 통하지 않는 헝가이야말로 가장 튼튼한 보호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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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극도로 제한된 이 영화에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대신하는 것은 섹스이다. 몽골의 기후만큼이나 건조하게 그려지는 몇 번의 섹스는 극중 인물들의 심리적인 거리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헝가이가 아내의 육체를 어루만지는 첫 번째 섹스에서 아내는 남편의 손길을 받으면서 딸의 병을 걱정한다. 오래된 습관처럼 치러지는 그들의 섹스는 서로가 아닌 정면을 향해 평행하고 있는 그들의 시선처럼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 곳을 향해있는지를 보여준다. 헝가이가 최순희를 품으려던 시도는 그녀의 육체적인 거부로 좌절된다. 그러나 헝가이의 염소를 죽이는 최순희의 극단적인 저항은 오히려 그녀가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표면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과 대조되면서 그녀 내면에 숨겨져 있었던 강렬한 욕망의 분출처럼 느껴진다. 도망과 불안으로 점철된 탈주가 아닌 정주된 인간의 삶을 영위하고 했던 그녀는 헝가이라는 보호막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느 날 바람처럼 찾아온 한 여인과 헝가이가 사막에서 자유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섹스를 향유하던 날 순희는 자신의 내밀한 욕망이 연정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감지한다. 그런 그녀의 잠재된 욕망은 엉뚱하게도 헝가이가 아내와 딸이 있는 울란바토르로 떠난 뒤, 군인 청년의 육체 위에서 분출된다. 엇갈린 욕망의 시점과 상대가 뒤바뀐 섹스는 결국 최순희 모자로 하여금 또 다시 길을 떠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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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의 카메라는 인물을 열심히 좇지도, 그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일러주지 않는다. 풍경과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카메라의 시선을 인물들은 지나쳐 가버리기도 하고, 이미 저 만치 가버린 인물을 카메라가 뒤늦게 따라가 응시하기도 한다. 장률 감독은 그것이 몽골에서의 시간감각이며 인간간의 거리라고 말한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과 자연의 호흡, 그것이 이 영화의 생명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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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이번엔 중국에서 찍은 줄 알았네 - 경계 (2006)

    2007/11/30 22:00 | TRACKED FROM 1004ant의 한일영화 이야기

    [18금] 투야의 결혼을 보곤 몽골 영화라 생각했다가...이번엔 몽골 영화를 보곤 중국내의 내몽골에서 찍은 중국과 한국 합작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몽골에서 찍은 독립영화... 화면도 지직거리는 점들이 계속 보이고, 대중영화에서는 얼굴을 내밀지 않는 서정이란 여배우도 나오고.. 독립영화들은 바쁜 생활에 찌들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미안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어려웠다. 덧붙여, 서정이란 배우.. 출연 개런티로는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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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1004ant 2007/11/30 22:06

    글 읽고 갑니다...


* 우연찮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볼룸영화 두 편, 쓸쓸한 가을 춤바람으로 마음을 달래 보시죠.
활력이 필요하신 분, 눈요기감을 원하시는 분께는 <테이크 더 리드>를 공허함을 달랠 동지를 원하시는 분께는 <차밍스쿨&볼룸댄스>를 권해드립니다만, 너무 많이 기대하진 마시길~~!!



테이크 더 리드 (2006, Take the L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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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한 마디로 볼룸댄스 버전의 <위험한 아이들(Dangerous Mind,1995)>다. 교사가 주인공인 대부분의 학원물은 일정한 공식을 따르는데, 일단은 문제가 많은 학생들이 있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사무적으로 대하려는 선생들이 있다. 이때 좀 더 진보적이며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선생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학생들의 반발과 비웃음을 사지만 결국은 교과과정 이외의 창의적인 ‘무엇’을 통해 소로 소통하게 되며 그 선생을 진정한 스승으로 인정하게 되고, 그 ‘무엇’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재능을 최대한 발산하며 영화는 끝난다. <테이크 더 리드>는 이 공식을 아주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 ‘무엇’이 다소 시대적인 감각과 맞지 않아 보이는 볼룸댄스라는 것과 다소 느끼하지만 고전적인 매력이 넘치는 피에르 듈레인(안토니오 반데라스)이라는 볼룸댄스 교사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정도다.


너무나 익숙한 공식에 춤이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덧붙였기 때문에 무난하고 재미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다. 문제 학생들은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혹은 기대)을 충족시켜줄 만큼 타고난 춤꾼들이고, 듈레인은 왜 하필이면 볼룸댄스를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듈레인의 교습을 통해 무엇을 얻고, 그 이전과 어떻게 다르게 성장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감독은 힙합과 볼룸댄스라는 소재를 시청각적으로는 탁월하게 조화시켰지만, 그 안에 뿌리박혀 있는 계층적, 사회적, 인종적 문제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길을 택했다.


차밍 스쿨 & 볼룸 댄스 (2005, Marilyn Hotchkiss' Ballroom Dancing And Charm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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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의 서사가 얽혀 있는데 하나는 부인의 자살로 인해 끝없는 공허감에 시달리는 제빵사 프랭크(로버트 칼라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목격한 차량 사고의 운전자 스티브(존 굿맨)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원제인 ‘마릴린 호치키스의 볼룸댄싱 앤 참 스쿨’은 스티브가 소년이었을 때 그가 매너 있는 남자로 자라기를 원했던 엄마가 보냈던 볼룸 댄스 학원의 이름이다. 프랭크는 스티브의 부탁을 받고 그의 첫사랑인 금발 소녀 리사와의 약속을 대신 지켜주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가 춤을 배우며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레디스(마리사 토메이)라는 여인을 만나 무기력증에 빠졌던 자신의 삶에 활력을 되찾게 된다.

이 작품은 분명 춤에 관한 영화이긴 하지만 보통의 댄스 영화들처럼 화려한 무대나 배우의 멋진 댄스 실력을 감상할 기회를 선사하는 대신 상처받은 인간들, 특히 죄책감을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자포자기나 폭력으로 전환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랭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내의 자살로 인해, 메레디스의 의붓오빠 랜들(도니 월버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어린 동생을 보호해주지 못했던 어린 시절때문에 고통받지만 이들이 춤을 통해 자긍심을 되찾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고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힘이 있고 주제의식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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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결혼 (2006, Tuya's Marriage / 圖雅的婚事)

* 간만에 강추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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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속담에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개도 사랑해줘. (love me, love my dog)"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도 사랑해주길 바란다는 뜻인데, 만약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에 배우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올해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인 왕취엔안 감독의 영화 <투야의 결혼>에서 주인공 투야(위난)는 이런 조건을 내걸고 새로운 결혼 상대자를 물색한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편 바터와 두 아이를 위해 낙타를 타고 초원을 가르며 양도 치고, 멀고 먼 우물까지 매일 두세번씩 물을 길어 날라야 하는 투야는 씩씩하게 가족을 부양해 왔지만 척추에 무리가 와서 더 이상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정을 받는다. 합의이혼을 한 뒤에 새로운 남편감을 물색하는 그녀가 내세운 유일한 조건은 자신의 전남편 바터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야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남성들이 구혼을 하지만 바터의 존재가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과연 그녀는 행복하게 새로운 결혼에 이를 수 있을까?

여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수많은 자녀를 둔 남성에 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곤 한다. 그러한 일부다처형태의 가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종교적 전통과 사회적 인식 그리고 경제적인 부이지만, 일처다부의 가족은 그 반대의 이유로 좀체로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투야는 서류상 이혼한 여성이기때문에 법적으로 일처다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로 이루어진 가족을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잠깐 앉아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가족구성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처럼 영화 속 ‘투야의 결혼’은 녹록치가 않다. 구혼자들은 투야를 설득하려 하거나 전남편을 요양원에 보내버리려고 하는 등 계약조건을 자꾸 바꾸려고 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다정한 이웃 썬거가 남편이 되기를 자처했을 때에도 투야의 아들 짜야는 아버지가 둘이라는 놀림을 이겨내야 하고, 두 남편들은 편치 않은 속내를 드러내며 다툼을 벌이고 만다.

내몽고의 초원과 농촌 부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투야의 결혼계획은 <아내가 결혼했다>의 아내처럼 쿨하고 전복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과 가족에 대한 책임이라는 매우 전통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투야의 선택은 남편이라는 존재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부장에서 부양해야할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바꿈하도록 하고, 일대일의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환영 속에서 폐쇄적인 관계로 구축된 ‘가족’의 의미를 현실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영화 속 그녀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어떠한 이론보다도 전복적으로 사회의 규약을 바꾸는 것은 우리를 압박하는 현실, 실재의 힘 그 자체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작품은 하나의 가족을 발생하게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둘러싼 사랑이라는 실체없는 감정놀음이나 낭만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모두 걷어내고 그 속에 깔려있는 경제적인 의미와 성적 계약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영화의 많지 않은 대사에는 결혼과 관계에 관한 톡 쏘는 일침이 들어있고, 투박한 행동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정갈한 서사가 주는 재미가 있다.

 

투야의 결혼 (2006, Tuya's Marriage / 圖雅的婚事)

배급사 : 스폰지 / 수입사 : 스폰지, 씨네클릭 아시아, 팬텀

감독 왕 취엔안 배우 위 난 / 바터 장르 드라마 등급 미상 시간 96 분

개봉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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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 준 - 투야의 결혼 (2006)

    2007/11/15 21:13 | TRACKED FROM 1004ant의 한일영화 이야기

    좋아해서 헤어지는 상황에 내가 미안해진다... 몽고 영화인 줄 알고 보았고, 보면서 몽고어가 중국어랑 비슷하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중국영화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스터와 다르게 여주인공은 영화 내내 이쁜 외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은 아름다웠지만... 영화를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이질적인 문화에서 오는 충격이 있는데. 사실 그런 걸 원해서 본 영화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Comment

  1. 2007/10/29 20:52

    오~ 누나의 강추작이라면 꼭 봐야죠 :)
    근데 단관 개봉 뭐.. 그런건가요?
    애인이 '따뜻한 영화' 보고 싶다고 해서, '도쿄타워'보러 가는데, 이거 먼저 알았으면 이거 볼껄 ㅎㅎ

  2. 사랑과 결혼 2007/11/01 12:28

    흥미로운 영화네요. 여러가지 이유로 꼭 봐야겠습니다. ^^

    근데 "사회의 규약을 바꾸는 것은 우리를 압박하는 현실, 실재의 힘 그 자체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는 짐씨네님의 지적,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만들어진 '변화'는 왠지...우리 스스로의 의식이나 자발적인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것만 같아서 안타깝단 생각도 듭니다.
    '생계형' 일처다부말고.. '진정한'(?) '혁명'은 불가능한 걸까요...?

  3. BlogIcon 짐씨네 2007/11/03 20:57

    근데 전 '생계형' 혁명의 힘이 이론적, 의식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의식적으로 떠드는 것들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원형대로 발현되기가 어려운지...를 스스로 새삼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요?
    어쨋든 투야의 혁명이 술상머리에 떠드는 제 주접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더군요.
    결혼식에서 흘린 그녀의 눈물이 빨리 마르기를, 그리고 앞으로 흐르지 않기를 기대하지만 아마도 매우 힘든 일이겠죠.

뒤로 가는 연인들 (2002, The Rules Of Attr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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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네 명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유럽 여행을 떠난 환상의 애인 빅터가 손꼽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고 있는 로렌(새닌 소사몬), 캠퍼스 내 약물 공급책이자 바람둥이인 숀(제임스 반 데어빅), 숀에게 흠뻑 빠져있는 폴(이안 섬머핼더) 그리고 관광보다는 여자를 꼬시는 일에 더 몰두한 채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빅터. 폴은 숀을, 숀은 로렌을, 로렌은 빅터를 향해 열심히 사랑의 작대기를 날리지만 관계는 이상하게 꼬여서 되돌아오는 것은 무관심과 매정한 냉소뿐이다. 젊은 대학생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기대하기 마련인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들의 관계에는 로맨스라는 낯간지러운 말이 들어설 틈이 별로 없이 오로지 매우 정신없는 파티와 섹스 그리고 약물로 뒤범벅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원작 소설과 동일한 ‘매혹의 법칙 The Rules of Attraction' 이다. 원제는 연애 혹은 섹스가 어떻게 시작되거나 좌절되는지를 부각시키며 청춘의 방황을 그린 이 영화의 내용적 특성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한글 제목은 이 영화의 형식적인 특성이 부각되도록 붙여진 것 같다. 이 영화의 감독이 <펄프 픽션>의 원안을 제공하고 퀀틴 타란티노와 함께 각본을 썼던 로저 에버리이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 대한 첫인상은 마치 ‘캠퍼스판 펄프픽션’을 보는 느낌이다. 일단은 여러 명의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하여 그들의 각기 다른 상황들을 하나로 조합해내는 형식이 매우 유사하고, 마약과 술에 쩔은 대학생들의 삶과 그들이 내뱉는 시니컬한 유머가 <펄프 픽션>속의 갱스터들의 삶과 묘하게 통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때때로 정말로 ‘뒤로 가는’데, 우선은 영화의 시작부분이자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실제 스토리 시간상으로는 가장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또 수시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역회전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뒤로 가기를 시도한다. 이 영화는 이 외에도 빅터의 유럽 여행 장면을 저속 촬영 화면과 랩에 가까운 나레이션과 함께 제시하기도 하고 고속촬영으로 일상적인 순간에서 시간을 잡아두기도 하면서 형식적인 실험들을 감행한다. 교차편집과 화면분할을 통해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출발한 로렌과 숀이 한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것을 재치있게 보여주기도 한다. 감독은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놀아보기로 작정한 듯 많은 영상적인 실험을 하는데, 문제는 그 실험이 완전히 신선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면서 지루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데 있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가끔씩 통찰력이 반짝이는 독백을 내뱉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사랑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는 치기어린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치기를 귀엽게 보아주기에는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퇴폐적이거나 퇴행적이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떠안은 청춘의 고뇌는 공감하기에는 비현실적이고, 매료되기에는 너무 가벼워서 마음으로 와 닿기 전에 화면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제임스 반 데어빅이나 제시카 비엘스타가 된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보거나 오랜만에 페이 더너웨이의 얼굴을 만나는 반가움같은 숨은 재미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백분을 넘게 버텨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감독 로저 에버리

배우 제임스 반 데어 빅 / 새닌 소사몬 / 이안 섬머할더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시간 109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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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크고 있을까.

                                                                                    김지미

<괴물>의 비극은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강두(송강호)가 현서(고아성)의 손을 놓치는 데서 시작된다. 관객이 무자비한 괴물과 무책임한 정부를 책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서가 그 끈적끈적한 손에 감겨 한강 둔치 어딘가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두는 현서의 손을 놓쳤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네가 그러고도 아빠냐’는 비난을 듣는다. 그 말 속에는 아빠라면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보호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서는 아빠의 손을 놓치는 순간 어른들이 알 수 없는 ‘괴물’의 세계로 끌려갔지만 거기서 그녀는 스스로뿐만 아이라 어린 동생을 돌보며 탈출을 기획하며 ‘맥주 한 모금’의 맛을 깨닫는 어른이 된다. 비록 그것이 어른의 상상인지, 아이의 현실인지는 모호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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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의 통과의례는 영화화하기에 언제나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기에 성장통이 갖는 보편성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동시에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주체가 아직은 사회적으로 홀로서지 못한 미성숙한 주체이기에 그들의 성장에는 언제나 부모 혹은 어른들로 대변되는 기존 세계와의 관계 정립이 포함된다. 그런데 2006년 상반기에 눈에 띄는 성장 영화들의 공통점은 부모의 부재 혹은 ‘손을 놓친’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조력자들


조창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피터팬의 공식>은 전형적인 성장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터팬’이라는 아이콘이 환기시키는 바 그대로, 이 영화는 남성적 자아가 형성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잘 나가는 고교 수영선수였던 한수(온주완)은 어느 날 갑자기 “나 이제 수영 안 해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수영장을 떠난다. 수영장에 갇혀 지내느라 오히려 낯설어진 교실에 앉아서 창 밖만 내다보던 그에게 전해진 엄마의 자살기도 소식. 엄마는 삶이 “허무해서”라는 말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의 주소만 쪽지에 남긴 채 혼수상태에 빠진다. 한수는 졸지에 엄마의 병원비와 자신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지만 주변엔 도움을 청할 어른이 한 명도 없다. 다만 그는 옆집 아줌마 인희, 그녀의 딸 민지 그리고 같은 병실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혼수상태의 엄마를 보살피는 미진과의 관계를 통해서 숨을 쉴 뿐이다. 세 명의 여인들은 돌아가면서 그에게 웬디나 팅커벨이 되어 준다.


이 영화에서 한수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이다. 그의 엄마가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그 순간 아들 한수는 모든 의무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그가 마지막 보루로 믿고 찾아갔던 아버지는 다른 가정의 가장이 되어 이미 한수를 잊어버린 상태이다. 사실적인 시각을 견지하기보다 환상적, 상징적인 기법을 빈번하게 차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한수가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수영장의 레인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여유있게 유영하던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와 대조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 속의 한수는 허우적거리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한수에게 닥친 삶의 조건들은 아직 미성숙한 ‘피터팬’인 그를 바다 속으로 팽게친다. 그러나 사실 이 ‘피터팬’이라는 수사는 그에게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피터팬’이란 어른이 되어야할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아이로 안주하고 싶어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지, 한수처럼 충분히 성숙할 틈도 없이 비자발적으로 어른이 되도록 강요된 청소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피터팬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여건때문에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고 방황하는 사이 피터팬으로 내몰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거친 파도 속에서 살아나느냐, 죽느냐에 대한 고민은 온전히 한수의 몫이며, 어른들은 그의 고민을 들어주지도, 현실적인 책무를 덜어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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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간다 (龍が如く 劇場版: Ryu Ga Gotoku,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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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V무비에서 메이저 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한 해에 두세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용이 간다>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다. 플레이스테이션2 성인용 게임인 <용과 같이 龍が如く>를 영화한 작품인데, 보통 게임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 매끄러운 스토리 전개로 게임의 단절적인 서사를 넘어서려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다카시의 작품은 과장된 캐릭터와 개연성에는 크게 구애되지 않는 게임의 속성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끌고 들어왔다.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다’라며 감독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드러난 영화는 ‘재미없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감독의 태도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 영화는 재미를 위해 다소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을 빠른 속도로 이어나간다.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유랑자>의 주인공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전설적인 야쿠자 키류 카즈마(기타무라 카즈키)가 10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카무로쵸에 돌아오자마자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검은돈 100억엔이 사라지고 이를 둘러싸고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돈이 모두 인출된 텅 빈 은행을 털러 들어간 바보같은 강도 콤비, 야쿠자의 싸움에 휘말렸다가 충동적으로 강도로 돌변한 젊은 커플, 사라진 암흑가의 대부 카자마, 정체불명의 한국인 킬러(공유)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이어주는 허브와 같은 디비디 가게. 사랑했던 여인 유미와 은인 카자마의 행방을 쫒는 키류는 우연히 만난 고아소녀 하루카가 엄마를 찾는 것을 도와주게 되는데, 집요하고 악랄한 야쿠자 마지마(기시타니 고로)가 끈질기게 이들의 뒤를 밟는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의 하루밤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며 풀려나간다. 어떤 부분들은 아귀가 잘 맞아들어가지만 다른 부분들은 너무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런 낯설고 불친절한 스토리 전개에 대해 다카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게임을 하라고, 또 게임을 하는 것처럼 영화를 즐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게임과 인터렉티브하게 연동시켜 감상할 때 이백프로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과도한 남성성을 뽐내는 야쿠자들의 세계를 살짝 비트는 유머와 게임속의 화려한 액션을 실사화한 멋진 장면들 덕분에 영화자체만으로 충분한 오락거리를 제공한다. 게다가 허가가 나지 않아서 몰래 촬영했다는 신주쿠 가부키쵸의 밤거리를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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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부천 영화제의 깜짝 상영을 통해 한국 관객을 미리 만나기도 했던 이 영화 안에는 한국이 곳곳에 숨어 있어 우리나라 관객들이 반가워할만한 잔재미들도 숨어있다. 킬러로 등장하는 공유가 일본어를 들려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그와 만나는 모든 일본인들이 어눌한 한국어를 하는 장면은 신선한 웃음을 던져주고, 김기덕과 그의 영화제목을 암호로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귀여운 장난기가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머리속을 탐구하도록 하기보다는 원초적인 쾌감들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미이케 다카시는 이번 작품에서 이제는 식상해지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은 야쿠자의 세계를 매우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다시 포장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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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글쎄...그러나 들을 만한 음악 영화 두 편

- <카핑 베토벤>과 <페이지 터너>


비슷한 시기에 음악을 소재로 한 여성 영화가 두 편 나왔다. 여기서 여성 영화란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 때문에 붙여 본 말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감정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성 영화라고 할 만하다. 한 편은 드니 데르쿠르 감독의 <페이지 터너>이고 다른 한편은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카핑 베토벤>이다. 두 편 다 아주 형편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눈이나 머리보다는 귀에 주는 쾌감이 훨~~씬 크다는 점에서 강추하기는 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냐? 그 음악들은 이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라 유명한 클래식 선율이기 때문에 굳이 이 영화들이 아니어도 감상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연이라도 이 영화들과 조우하게 될 이들을 위해 소개 말씀을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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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페이지 터너>... 이 영화는 일종의 복수극이지만 피 한 방울, 가벼운 주먹 한 번 날리는 일 없이 매우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복수를 치러낸다. 복수란 단순히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신체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그려진 작품을 수시로 접했던 관객에게는 이 영화 속의 복수는 다소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음악 학교에 입학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멜라니(데보라 프랑소와- 애띤 그녀의 얼굴이 낯익다했더니 다르덴 형제의 ‘차일드’에 나온 십대 싱글맘 역할을 했던 소녀였다)는 심사위원인 아리안(캐서린 프로트)이 팬에게 싸인을 해주느라 주위를 분산시키는 바람에 실수를 하게 되어 시험에 떨어진다. 그 뒤로 피아노 치는 것을 그만 둔 멜라니는 10년 후 아리안의 집에 보모로 들어가 그녀의 커리어와 가족 관계 그리고 아들의 장래까지 모두 망쳐놓고 홀연히 그 집을 떠난다. 파리콩세르바투아르 출신 음악가로, 파리 플레이엘 및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드니 데르쿠르 감독은 음악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극복할 수 없는 무대 공포증,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할 기회 상실 그리고 잘못된 연습으로 인한 근육의 훼손 이런 것들이 멜라니의 복수극을 위한 재료들이다. 여기에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아리안의 성적 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주는 일까지 더해진다.



제목인 ‘페이지 터너’는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이를 가리키는 말로 보모로 취직했던 멜라니가 아리안의 공연에서 일시적으로 맡게 된 역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페이지 터너가 전체 연주를 망칠 수도 있다’라는 호로비츠의 말을 빌려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리안의 연주를 위해 페이지를 넘겨주던 멜라니가 아리안의 연주자로서의 삶과 한 가정 내에서의 지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삶의 페이지를 넘겨주게 된다는 기본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문제는 멜라니가 음악을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매우 단순하게 제시된 것처럼 복수의 결말 역시 너무나 깔끔해서 밋밋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가 극적 긴장감을 살리는데 많이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뭔가 더 나올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지점에서 끝나고 만다. 클래식 선율을 타고 흐르는 인물간의 미묘한 심리전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음향효과나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 공포감을 자극하는 대부분의 스릴러들보다는 참신하게 다가오지만 긴장감을 유발하는 서스펜스나 치밀한 플롯에 의한 심리전의 재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감독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멋진 페이지 터너 역할을 해내지만 피아니스트의 꿈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영화가 얼마나 깊은 공포감이나 긴장감을 자아낼지는 미지수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저 남 일같이 느껴졌고, 뭐 저런 일로 저렇게 앙심을 품을 것까지야 입학 시험을 몇 번 더 도전을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서 봤던지라. 다른 관객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된다. 복수의 결말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아리안의 삶에 회복될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다고 보기 힘들어서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운 멜라니의 자족하는 표정이 다소 쌩뚱맞게 느껴지고 했다는......그렇지만 피아노 연주를 둘러싼 갈등이 영화의 처음과 끝까지 등장하는 만큼 피아노 연주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멋진 협연을 담은 장면 그리고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을 듣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다음은 <토탈 이클립스>에서 랭보와 베를렌느의 정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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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교감을 다뤘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신작 <카핑 베토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이 작품은 베토벤과 카피스트 안나 홀츠라는 여성 사이의 미묘한 사제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음악 학교의 우등생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는 교수의 추천으로 청력을 잃어가는 말년의 베토벤(에드 해리스)의 악보를 정리해주는 카피스트 자리를 얻게 된다. 괴팍한 성품과 고된 작업 때문에 남성들도 꺼리는 일이지만 안나 홀츠는 마에스트로의 작곡과정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처음에는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던 베토벤도 틀리게 기록된 악보를 알아서 수정하고 솔직한 감상평을 거침없이 내뱉는 그녀를 신뢰하게 된다. 약해진 청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휘하기를 주장하는 베토벤이 안나의 도움으로 멋지게 9번 교향곡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장면은 둘 사이의 음악적인 유대와 인간적 신뢰가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중한 선율의 향연으로 귀를 매우 즐겁게 만든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아 저 곡을 꼭 CD로 사서 다시 들어봐야지 했지만 이주가 지난 지금에도 그 다짐은 실행과 담 쌓고 있다.



홀란드 감독은 안나라는 허구적인 인물을 통해 베토벤의 삶을 조망하는 동시에 한 분야의 거장인 남성을 스승으로 모시는 여성이 겪게 되는 인간적인 고충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토벤은 안나를 좋은 조력자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녀를 동등한 작곡가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건 그녀가 만든 작업이 다소 허접해서이기도하고 경력이 워낙 일천해서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지점은 그녀가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하면서도 일상다반사로 겪는 여성의 문제이기도 한데, 나이많고 권력있는 남성과 부딪히게 될 때 그것이 연령이나 경력에 의한 차별인지 성별에 의한 차별인지가 모호해지면서 ‘내가 남자라면’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가정들을 끊임없이 해보게 된다. 이 가정이 왜 얼토당토 않냐면...그런 가정을 통해서는 정답에 도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저 내 눈 앞에 닥친 고통과 부조리를 견디려는 변명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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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좀 더 훌륭해지려면 이 부분을 파고들면서 안나가 그것에 어떤 답변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줬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애인과의 관계에 자꾸 끼어들어 파탄을 내고 심지어 거의 성추행에 가까운 짓거리까지 수시로 하는 베토벤. 이를 보며 당황하는 안나의 모습엔 분명 사적 영역을 수시로 침범하는 남성 상관과의 관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라는 현재적 문제의식이 존재하긴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마에스트로의 후광으로 유야무야되곤 한다. 그리하여 감독이 고안해 낸 안나 홀츠는 인간 베토벤을 보여주는 새로운 창이 되기보다 악성 베토벤에게 부여된 숱한 찬사들에 한마디를 덧붙이는데 머무를 뿐이다. 안나는 처음에는 베토벤의 작품을 필사(copy)해 주지만 작품 뒤로 갈수록 기존에 늘 있어왔던 그의 명성과 천재성에 대한 찬탄을 다시 한번 카피해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매우 치명적인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가상의 안나는 왜 탄생했어야 하는 것일까?’(그니까 이 영화 왜 만들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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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ethoven 2007/09/26 07:56

    사실 <카핑 베토벤>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영화는 <불멸의 연인>이었는데요. 베토벤이 결혼을 안 해서인지, 그의 사생활을 둘러싼 가상의 연인을 자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안나의 역할이 너무 단순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죠. 그래도 뭐....듣는 재미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교향곡 9번을 이 영화 보고 나서 다시 들어봤으니까요. 참, 영화에선 아주 짧게 스치긴 했지만, 베토벤 말년 협주곡에 대한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이 도리어 흥미로웠죠. Edward Said가 베토벤의 말년 작품 스타일에 대해 쓴 것도 생각났구요...

  2. BlogIcon 짐씨네 2007/09/26 12:47

    역시 저처럼 결심만 하고 끝내는 인간이 있는가하면...이렇게 다시 들어보시는 분도 계시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베토벤의 협주곡이 초연될 때 분위기가 한물 간 뮤지션의 의외로 멋진 컴백처럼 다뤄져서 재밌더군요. 마치 나훈아의 재발견같은 느낌이었다고나할까요.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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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남녀간의 사랑이 시작되고 깨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순간들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데뷔작이었던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남자와 너무도 건강하고 해맑은 여자 사이에 호감이 연애 직전까지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다뤘다. 미래가 없는 남자는 여자를 일정한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여자는 그의 태도가 원망스럽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끝을 예감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의 마음 아픈 관계는 이후 그의 작품에서 계속 변주되는 모티프이다. <봄날은 간다>의 여주인공인 은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상우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었지만, 마음마저 지울 수 없는 것이기에 돌아왔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상우는 은수와의 이별이 한번 두번 쌓여갈수록 마음속의 미련들을 조금씩 털어내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덧없는 ‘봄날’처럼 아스라히 사라져간다. 각자 서로의 배우자들이 저지른 외도 때문에 만나게 되었던 <외출>의 두 주인공들의 관계는 이미 여러 한계들로 답답하게 막힌 출발선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따듯한 봄날에 갑작스럽게 내린 눈(April snow-외출의 영어 제목)같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그의 새 영화 <행복>의 모든 이야기는 영화의 첫 씬에서 영수(황정민)가 틀어놓은 라디오  DJ 멘트 안에 다 담겨있다. ‘처음 만난 날의 설레임으로 사랑한다면, 첫 출근하는 각오로 일을 한다면,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그렇다면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겠죠?’ 영화는 이 멘트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수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는 애인 수연으로부터 결별을 확인받고, 자신이 경영해 오던 클럽을 친구에게 팔아넘겨야하는 경제적 상태이며 간경변으로 인해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요양원 ‘희망의 집’에 도착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것도, 심지어 웃음마저도 잃은 영수는 요양원에서 폐가 사할밖에 기능을 못한다는 중증 폐질환자인 은희(임수정)를 만나면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영수보다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만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건강함이 그를 조금씩 물들이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은희의 제안에 영수가 한다발의 들꽃으로 응답함으로써 행복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는 행복이란 감정은 언제나 시간과 그것에 동반하는 변화들에 무력하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는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영수에게 주어진 소박한 행복은 그가 잃은 것들을 조금씩 회복해나가면서, 즉 수연이 그를 다시 욕망하기 시작하고 친구는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 결정적으로 그를 시골에 묶어두었던 병든 간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영수에게 고즈넉한 시골의 풍경은 한없이 지루한 것이 되어가고, 소박한 은희의 성품은 궁상맞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의 행복은 은희가 없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분수처럼 쏟아지던 행복의 근원이었던 은희가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면서, 그는 자기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함께하기를 갈구하는 은희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고 싶은 영수가 그녀에게 들려줄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인 것이다.


감독은 이 작품에서 ‘행복’에 대한 아주 오래된 우화 ‘파랑새 이야기’를 현대적 멜로드라마로 재해석한다. 행복을 꿈꾸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영수의 눈길은 언제나 자기가 있지 않는 곳을 향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보려하지 않는 이는 끝없는 결핍의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결핍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것 같은 행복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후반부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마련해야 하는 노후자금 ‘4억 7천’은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하찮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없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무시하고 쉽게 스쳐지나가 버리며 행복의 순간들을 끝없이 유보해버리는 것. 영수가 은희를 떠나서 추구하는 삶은 고작 그런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로 포장된 허상들을 추구하기 위해 초래된 지금의 고통을 술과 담배와 같은 말초적인 자극들로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 현대인의 삶이다.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도저히 몸을 빼낼 수도, 달음박질을 멈출 수도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같은 삶으로 돌아간 영수가 행복과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은희가 그보다는 조금 더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더 현명하거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죽음 때문에 살아있는 순간들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행복으로 더 멀어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행복은 어쩌면 그것에 무심할수록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실천하기는 힘든 행복의 아이러니가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분화된 공간 안에서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연애를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통해 자아는 어떤 욕망이 충족되기를 원하고 그것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추동해나가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유머러스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사랑 안에서 진동하던 감정의 울림들이 삶으로 더 많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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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2007/10/13 23:17

    옹~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줄 위에서 2번째.. '더 많은 유머러스해졌지만' '더 많이 유머러스해졌지만'의 오타인 것 같아요 :)

    참.. 그런 것 같아요.. '팔월의 크리스마스'랑 '봄날은 간다'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외출>이후는 보기가 싫어서 안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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