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NYPD 라던지, SWAT라는 문자가 새겨진 모자나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때마다 '흠칫'한다. I♥NY 이라는 티가 한때 유행이었고, 이는 눈쌀이 약간 찌푸리게 했을 뿐인데, NYPD나 SWAT 같은 것은 잘 이해가 안 된다.
NYPD는 New York Police Department의 약자이고, SWAT는 Special Weapons and Tactics로 전자는 뉴욕 경찰임을 나타내는 표시이고, 후자는 미국 경찰 특수기동대를 의미한다.
뭐..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 뉴욕 경찰을 좋아하든, 히틀러의 겨털을 숭배하든, 악마의 애인이 되고 싶어하든 남이 상관할 바 아니지만, 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쓰고 다니는 것일까...
아, 나는 이제 문화의 흐름에서 뒤떨어지는, 문화 리터러시 재교육을 받아야 할까.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울 엄매가 나 고딩때, 바지 끌고 다닌다고, 그게 뭔 놈의 멋이냐고 했을때, 언제고 나도 저렇게 될 날이, '현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날이 올 줄 알았던 것이다.
뭐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그냥 글자들이 멋있어서 입는거지, 글구 미국 경찰들은 왠지 뽀대 나잖아, 왠지 뉴욕은 멋있잖아, 라고 한다면, 그래도 나는 문자 문화에, 문자 묘지에 경배하는 묘지기의 일족이라서 그런지, 그 의미가 불편하다구웃!
나는 미국이, 그것도 뉴욕이, 그것도 뉴욕 '짭새'가 무섭고 싫고 불편하다고;; 너희랑 나랑 왜이리 다를까. 나도 관타나모 다녀온 것은 아닌데, 나는 왠지 백인이 싫고, 미국하면 미군이 떠오르고, 미국경찰하면 LA폭동 당시 그들의 편파적인 보도랑 진압과, 권위적인 뚱보와 인종차별이 떠오른다고오. 이라크 침공과 부시의 원숭이 귀와, 수많은 적대적 M&A와 공격적 금융자본과 IMF의 원흉 등등.. 나는 미쿡이 싫고도 무서워요~
뭐 많은 생각 하고 입었을까요? 저도 어렸을 때 즐겨 입었던 사파리가 나중에 보니 US ARMY여서 다소 흠칫했었다는...
오히려 뜻을 모르고 입는 것은 브리트니가 호남 향우회를 입는 것처럼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닐 듯.
뜻을 알고도 미국 군대나 경찰 혹은 특수부대에 경도되었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달의 바다> 2007년도 제12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 저자: 정한아. 1982년생. 건국대학교 국문과. <걸 프렌즈> 2007년도 제3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저자: 이홍(본명: 박희선). 1978년생. 안양예고 문창과 -서울예대 문창과. 언론 재벌집 며느리. (국문과 생의 자격지심인지, 콤플렉스인지, 편견인지(결국 비스무레한 말;;;), 여튼 국문과나 문창과 출신 글쟁이라고 하면 고개를 우선 갸웃거리고 들어가기 십상. 뭐 불문과 정도는 되야지, 글 좀 쓰겠구나... 라는 이미지랄까. 아님 대학을 안 나왔거나, 법학과 정도면 한번 슬쩍 끄덕여주는데... 근데 요즘은 문창과의 대량생산 체제 확립... 쩝.. )
이 두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 아, 이제 한 시대는 끝났다. 웃기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 후쿠야마 선생처럼, 그냥 지 좋을대로 안온한 연구실에 앉아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제서야 진정 21세기 문학들이, 21세기 작가들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한다는 느낌. 물론 이 '21세기'라는 것은, '21세기'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포스트모던'을 아주 포스트포스트한 의미로 사용할 때의 느낌.
90년대 초중반, 한국 문학계를 휩쓸었던 여성 작가 트로이카의 여성주의+후일담+불륜의 삼위일체를 넘고(*근데 사실 요즘에 다시 신경숙을 읽어보니, 이 분은 참 혜성처럼 등장해서 은은하고 좋다, 뭐 요즘 소설을 읽으면, 너무 조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공선옥!), 장정일, 문학계의 서태지도 흐르고, 김영하는 아저씨가 되고, 윤대녕은 그 쪼잔함과 쿨함이 김빠진 맥주처럼 쇠잔해지고, 이제 피도 쉬었나 백민석, 공부쟁이 김연수, 잘난척 재수 정이현, 뭐하자는 건지 천명관, 요즘 뭐하나 한강, 이거 평론가들이 왜 좋아하지 윤성희, 그래도 김애란,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온 마초 김훈 등등 아무렇게나 호명해본 이들과 마주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21세기'!
설마 아직도, 어딘가에서 운동하고 있는 방현석이나 유재현, 불란스서 조선 고전을 파고계신 황구라를 서사의 미래라 생각카는 것은 아니겠지요. 서사의 미래란 오래전 '제국의 영원'인지 뭐시기 포스트모던인지 포스트표절인지를 구워내신 이선생께서, 리니지든지 와우던지 MMORPG야말로 미래의? 현재의 서사라 하지 않았겠소.
여튼. 이거이거 칙릿이면서도, 순정만화이면서도, 인공적 따뜻함에 마치 프로작을 넣은 밀크쉐이크를 먹은 직후에 핫초컬릿을 스타북스에서 테이크아웃하며 아이러브 니욕이라고 씨부리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달의 바다>를 읽었을 때는, 흐뭇한 미소나마 있었는데, 이 <걸 프렌즈>를 그 후 이어 읽으니 둔중한 울림이 옵디다 그려.
이거 문학상 관련 상'평론'같은 것을 써볼까.... 또 말만 해봅니다. 문학상의 계보라고나 할까요. 이거이거. 문학사회학 비슷하게도 쓸 수 있고, 담론의 계보도 그릴 수 있고, 재미나는 작업이지 않겠소.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상" 심히 '뉴웨이브'스럽소. 지난번의 '파라다이스 가든'또한 굉장히 르포스러웠는디. 이거 세계일보문학상이나 한겨레문학상 잘 팔리는 것 보고, 나름의 나와바리 구축을 위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소.)
(*아... 아이러브 니욕! )
역시. 21세기란. 아이러브 니욕! (혹자는 '아이러브 니욕'에서 남이야기 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추론하여, 이것이야말로 후일담 문학을 지칭하는 카피가 아니겠느냐 추론할 지도 모르지만, 후일담은 90년대적 현상. 21세기는 21세기였던 것...) 훗날 또 늙은 역사가는 9.11이란 결국, 21세기 기원이요, 아이러브 니욕이 아니겠소. 라고 적을꺼고, 그것이 지구촌이자 그 균열이었다고 쓸꺼요.
(*이것도 결국... 아.... 아이러브 니욕!)
아, 괜히 꼬장이었소. 일본소설을 욕하지만서도(내 후배 중 하나는 '편의점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요즘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이었소. 근대소설과 대결하기 위해, 근대소설을 썼다고 하며, 이제 이를 너머갈 것이라는 말. 이를 위해 쇼팽과 들라쿠르아에 대한 연구나 자서전은 물론, 당대 역사, 경제, 사회에 관한 연구서들, 복식사에 이르기까지 탐독한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잘 녹아있었오. 또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것은 마이클 창의 "당신 인생 이야기"였소.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문학도답게, 흥미로운 사고 실험으로 가득하였소. 모 잡지에서 소설가 박민규는 이삼년에 단편 한편 발표하고 먹고사는 그가 부럽다고 하였소. (기실 마이클 창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서두;) 히라노 게이치로만 해도 그렇소. 2~3년에 하나 쓰면 많이 쓴거요. 이렇게 구조적으로만 원인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요계가 음반 판매가 안되서 컬러링이나 배경음악에 음원판매로만 벌어먹고 사니, 모두다 소몰고 워우워워 오늘밤 외롭거나, 꿍짜리짜짜 오늘밤 불타올라 놀자놀자놀아버리자로 양분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문학도 나까무라 하루끼 익쇼니 다이죠부요우~ 달려라 오빠, 느리게 사는 슈퍼스타 식으로 귀결되지는 않을지, 괜히 오바하며 끄적인거요.
최근에 읽은 기대작 황구라 선생의 소설도 기대만큼 재미있지도 않았고, 별반 새로울 것도 없어서 콧방귀 꽤나 뀌었소. 나를 감동시키고 움직일 한국소설을 원하오. 그래서 오바 쫌 해보았소.
오바라.. 이거야말로, 익명글쓰기의 재미아니겠소. 나도 참 심심하오. 그래서 대작, 명작, 고전을 기두리는거요. 뭐.. 뭣하면 다시 칠조어론 암송이나 해야겠소. 아님 이영도, 네크로맨서님의 부활을 기둘리거나...
어쩌면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21세기 문학은, 네이버 댓글들의 연쇄가 형성하는 텍스트의 장일지도 모르겠소. 앞서 MMORPG가 서사의 미래라고 했던 이선생의 말을 대충 패러디표절 해본다면, 네이버 뉴스에 달리는 네티즌들 개개인이 짜내려가는 광대한 하이퍼텍스트의 그물이야말로 상호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서사이면서도 시적인, 수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사회에 대한 관심과 개인의 욕구표출의 길항작용으로 인해 야기된, 일본 하이쿠 문화나 조선의 공동 작시 문화 전통을 이으면서도 첨단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뭐 어쨌든 대충, 꽤나 흥미롭고 연구되어야 하는, 유사 민담적 적층문학의 새로운 계보에 선두에 있는, 리좀적이고 인터넷 포털사이트라는 홈패인 공간을 탈영토화하며 탈주하는 유목민적인,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젠장 힘들구나, 얼씨구 좋다, 판소리 추임새를 연상시키기도 하면서, 담론의 일방향성을 해체하는, 다중의 역동성과 그들의 아비투스를 들어내는 구별짓기로도 기능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공론장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그런데 커피는 별다방이 콩다방보다 맛있다는데, 왜 콩다방이 더 비싸죠?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비교에도, 맥도날드 쪽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글쎄... 취향이라는 것은 참, 여하튼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요?, 함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단순 알레고리 차원을 넘어서는 은유와 상징, 기의와 기표의 일의적 관계를 초월하는, 키보드 워리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키보드를 가지고 WWF에서 반칙기술로 마구 마빡을 까는 것이죠, 다중성이라는 개념자체를 재구성하게 하며, '텍스트'의 의미, '저자'의 의미를 밝히는, 그나저나 이번 대선은 어찌될까요, 스턴식 옆길 새기의 21세기 버전이며, 중심서사를 탈구축 해체시켜, 진정 탈중심적인 텍스트를 구성하는, 옆집 할머니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쩌죠?, 가르강뛰아와 팡타그리엘에서 나온 유명한 구절로 마무리를 해야하겠습니다, 나는 가르강뛰아가 더 좋아라고요! (재귀구조적 인식, 서사 형식과 내용의 서로 째려봄, 나는야 네티즌, 아이 엠 샘나~ )
* Being 르봉은 소문 필진 중 한명이 지 맘대로 불만을 털어놓고 꼬장을 부리는 공간으로, '편집실'이라는 필명에도 불구하고, 소문 편집인들 전체 의견과 상관없을 수도 있다는,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재밌는 것은 미국에선 creative writing이 english department와 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한국에선 문창과와 국문과가 분리되어서, 문창과를 약간 우습게 아는 경우도 많구요. 사실 이 둘이 분리되어서 생기는 문제는 꽤 큰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소양이 풍성한 이들이 직접적인 창작으로 뛰어들 기회가 부족해지는 것 같구요. 반대로 글을 기계적으로 쓰는 법만 배우고, 문학 시장에 뛰어드는 사람이 늘기도 하겠지요. 문창과의 '창'이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른 울림을 갖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미국의 좋은 학교 영문과는 영문학 수업에서 단편/장편을 써오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네는 그런 수업이 없으니 안타깝기도 하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문창과의 대량생산/대거진출"이 얼마나 수준 높은 작품을 담보할 수 있을지 걱정이되긴 하네요. 이것도 먹물들의 괜한 걱정인지. 사실 어디에서 어떤 훈련과정을 거치든, 좋은 글만 나오면 되긴 하겠지만요.
<괴물>의 비극은 괴물이 한강변에 나타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강두(송강호)가 현서(고아성)의 손을 놓치는 데서 시작된다. 관객이 무자비한 괴물과 무책임한 정부를 책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서가 그 끈적끈적한 손에 감겨 한강 둔치 어딘가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두는 현서의 손을 놓쳤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네가 그러고도 아빠냐’는 비난을 듣는다. 그 말 속에는 아빠라면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보호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서는 아빠의 손을 놓치는 순간 어른들이 알 수 없는 ‘괴물’의 세계로 끌려갔지만 거기서 그녀는 스스로뿐만 아이라 어린 동생을 돌보며 탈출을 기획하며 ‘맥주 한 모금’의 맛을 깨닫는 어른이 된다. 비록 그것이 어른의 상상인지, 아이의 현실인지는 모호할지라도 말이다.
소년, 소녀의 통과의례는 영화화하기에 언제나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기에 성장통이 갖는 보편성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동시에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무궁무진한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주체가 아직은 사회적으로 홀로서지 못한 미성숙한 주체이기에 그들의 성장에는 언제나 부모 혹은 어른들로 대변되는 기존 세계와의 관계 정립이 포함된다. 그런데 2006년 상반기에 눈에 띄는 성장 영화들의 공통점은 부모의 부재 혹은 ‘손을 놓친’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조력자들
조창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피터팬의 공식>은 전형적인 성장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터팬’이라는 아이콘이 환기시키는 바 그대로, 이 영화는 남성적 자아가 형성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잘 나가는 고교 수영선수였던 한수(온주완)은 어느 날 갑자기 “나 이제 수영 안 해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수영장을 떠난다. 수영장에 갇혀 지내느라 오히려 낯설어진 교실에 앉아서 창 밖만 내다보던 그에게 전해진 엄마의 자살기도 소식. 엄마는 삶이 “허무해서”라는 말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의 주소만 쪽지에 남긴 채 혼수상태에 빠진다. 한수는 졸지에 엄마의 병원비와 자신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지만 주변엔 도움을 청할 어른이 한 명도 없다. 다만 그는 옆집 아줌마 인희, 그녀의 딸 민지 그리고 같은 병실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혼수상태의 엄마를 보살피는 미진과의 관계를 통해서 숨을 쉴 뿐이다. 세 명의 여인들은 돌아가면서 그에게 웬디나 팅커벨이 되어 준다.
이 영화에서 한수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이다. 그의 엄마가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그 순간 아들 한수는 모든 의무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그가 마지막 보루로 믿고 찾아갔던 아버지는 다른 가정의 가장이 되어 이미 한수를 잊어버린 상태이다. 사실적인 시각을 견지하기보다 환상적, 상징적인 기법을 빈번하게 차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한수가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수영장의 레인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여유있게 유영하던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와 대조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 속의 한수는 허우적거리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한수에게 닥친 삶의 조건들은 아직 미성숙한 ‘피터팬’인 그를 바다 속으로 팽게친다. 그러나 사실 이 ‘피터팬’이라는 수사는 그에게 적확한 표현이 아니다. ‘피터팬’이란 어른이 되어야할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아이로 안주하고 싶어하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지, 한수처럼 충분히 성숙할 틈도 없이 비자발적으로 어른이 되도록 강요된 청소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피터팬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여건때문에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고 방황하는 사이 피터팬으로 내몰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거친 파도 속에서 살아나느냐, 죽느냐에 대한 고민은 온전히 한수의 몫이며, 어른들은 그의 고민을 들어주지도, 현실적인 책무를 덜어주지도 않는다....
내가 사는 일산의 한 동네 입구에도 현란한 채색의 간판을 단 “오션파라다이스” “황금성” 같은 게임장들이 몰려 있었다. “바다이야기”도 물론 있었다. 몇 개월 전 처음에 이사 와서 나는 막연하고도 순진하게, 이 크고 화려한 오락실들이 어렸을 때 다니던 전자오락실이 대형화한 것일 거라 생각했다.
코발트색 간판이 하도 눈에 띄게 예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데리고 “바다이야기”에 같이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지난 여름에 “바다이야기” 파동이 나서, 그것이 ‘성인’ ‘전자’ ‘도박장’이고 그 ‘성인오락’에 중독되어 파산자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이야기” 같은 전자도박에 우리 ‘국민’이 쏟아 부은 돈이 무려 3조에 달하고 이 큰 액수가 근래 우리 경제의 문제라는 ‘민간소비의 위축’에도 단단히 한몫했다 한다. 얼마쯤 되는지 짐작하기도 힘든, 이 3조라는 돈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전자 도박에 중독된 비용으로 지출된 것이다. 그 돈이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갔을까?
“바다이야기”는 노골적으로 돈을 갖고 하는 도박이어서 그 중독의 여파가 이처럼 쉽게 경제적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중독을 매개로 돈을 쓰게 만들고 돈을 벌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중독의 이율배반
몇 년 전 잘 아는 한 교수가 게임산업의 법적 규제에 대해서 연구하겠다고 찾아왔다. 그 교수는 그 전까지는 게임이라는 것을 거의 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규제를 말할 자격을 갖추려면 규제대상이 되는 게임이라는 것을 직접 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었다. 성실하고 순진한 그를 내심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난생 처음 게임의 세계로 푹 빠져들었다!!! 그가 빠져든 게임은 요즘은 너무 흔한 인터넷 “맞고”의 일종이었다. 두 달 후 그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나 “맞고에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했다.
대부분의 우리는 무엇인가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사람을 칭찬한다. 그러나 몰두가 지나친 사람이 있으면 걱정하게 된다. 몰두가 지나치면 자신을 해칠 뿐 아니라, 주위 사람과 ‘사회질서’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지나친 몰두가 자꾸 반복되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그가 “중독”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중독”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중독을 몰아내야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동시에 “중독”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돈벌이 수단이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다. 친척 동생이 게임을 개발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녀석은 “잘 나가는” 게임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게이머들을 얼마나 그 게임에 푹 빠지게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강변을 해댔다. 중독성이 없는 게임은 인기 없는 게임일 것이다.
남을 중독시켜야 큰돈이 된다! 그리고 인기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중독”이 문제라 하면서, 동시에 “중독”을 이용해 경제나 정치에서 성공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독의 이율배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개개인의 가치관 문제일까? 이 이율배반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인간 사회에서 다 목격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중독의 이율배반은 경제생활과 권력현상에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