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항상 여름이면 떠올려지는 가객 '쿨cool'. 정말 이해하기 힘들게 롱런했던 그룹이다.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여름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해변의 여인'. 정말 신나는 노래이지만, 가사를 유심히 듣다보면, 신나는 보컬, 리듬과는 달리 꽤나 꿀꿀한 스토리, 복잡한 구성으로 놀라게 된다.


해변의 여인
                                                작사:이승호 / 작,편곡:윤일상


우선 제목부터 조금은 야리꾸리한 느낌도 든다. 거성님의 '바다의 왕자', 그리고 이를 패러디(?)리메이크(?)한 '바다의 공주'등도 있지만, '해변의 여인'하면 뭔가 언덕 위의 하얀집이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좀 더 이 제목을 노려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바다의 왕자'라고 하면 왕자가 바다를 소유한 느낌이지만, 바다의 공주나 '해변의 여인'이라고 하면 지형지물에 공주나 여인이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가부장제 문화 속에 굳어진 '어감'일까? 즉 바다의 왕자면, 그야말로 바다의 지배자인 의미지만, 바다의 공주나 '해변의 여인'이라고 하면 바다에 놀러온 공주나, 해변에서 어슬렁대는 여인이 떠오른다는 의미. 나만 이런가? 어찌됬든 잡설은 그만하고 본설로 넘어가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선 유리라는 가객이 읊는다.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유리씨는 튜닝(?) 전이었다...)

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안에만 쳐박혀 있어
안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 버려 (유리)

다짜고짜! 버럭! '이게 뭐야'냐는 거다. 이 여름에 왜 방안에만 있냐는 것. 그냥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것. 괜시리 제목에서부터 딴지를 걸고 있지만, 이 또한 뭔가 여-남 권력관계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왜 어디를 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인 것인가. 왜 이 유리씨는 자기가 어딜가자고 하지 않고, 남자가 아무데도 안 데리고 가니까 '버럭'만 하는 것인가. 이 유리씨의 유일한 무기는 '버럭, 헤어져'이다.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능동적 노력이 아니라, 이 관계가 아니라면 다른 관계를 찾겠다는 '단칼'만이 무기인 것.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진도 죄송. 잘 생겼다고 단언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룹 내에서 상대적 우월성을 과시했던 이재훈. 필자가 잘 생긴 남자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고로 이 사진 채택. 필자의 중학교 선배인 이재훈씨! )

내품에서 흘린 눈물 너만큼 나 힘이 들었어 잃어버린 너의 미소 찾을 수 없을까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사랑을 위한 여행을 하자 바닷가로∼ (이재훈)

근데 또 이게 통한다. 이재훈이라는 가객이 곧 이어서 읊는다, '안녕하고 돌아서는 그건 아니잖아' 그리고 여자가 원했던 '방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 여성이 수동적으로 남성을 조종해서 원했던 것을 얻는 것이고 남성은 여성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미소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자고하는 것이다.

빨리 떠나자 야이야야야 바다로
그 동안의 아픔들 그속에 모두 버리게
이게 아니야 우린 사랑했잖아
이젠 다시 눈물 없는 사랑으로 만들어봐 후∼ (유리& 재훈)

버럭! 후에 '빨리' 떠나는 그들. 아픔을 모두 버리자고, 눈물 없는 사랑으로 만들자고 합창하는 그들. 근데 과연 잘 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헐.. 김성수.. 이분 '섹시'컨셉이라고 하시는데.. 별 사진이 다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바닷가를 걷고 난 쓸쓸히 바닷가를 혼자 걸어 갈 때
앗! 나처럼 혼자 걷는 여잘 보게 됐고 난 그 뒤로 하염없이 쫓아가게 됐어 (김성수)

어딜 갔어 이 밤중에 도대체가 이해가 안돼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버려 두니 (유리)


돌연 김성수의 랩이 나와서, 이것은 제3자인가 착각하기 쉬운데 그 다음에 유리의 가사까지보면 이 랩은 앞서 이재훈의 노래가 유리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이라면 김성수의 랩은 남성의 심정을 독백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뭔일이 있었는가. 우린 모른다. 갑자기 남자는 쓸쓸히 혼자 걸었다. 그러니 여자는 이 밤중에 남자가 어딜 갔는지 '도대체가 이해가 안돼'고 '여기까지 여행 와서 나만 혼자 내버려'둔 남자를 원망한다.

자, 맘대로 상상해보자. 남자는 여자를 위해 먼 바다까지 여행을 왔다. 피곤하고 지쳤을테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둘 중 누군가 약간의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 짜증은 순탄치 못한 여행전 감정들을 상대에게 증폭시켰을테고 둘은 화가 났을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화성 남자, 금성 여자'식의 분석에 도움을 얻자면 남자는 화가 나면 혼자있고 싶어하고, 여자는 대화로 풀려한다고 한다. 남자는 버럭 화가나서 박차고 나갔다. 여자는 더욱 화가 난다. 아니, 화났으면 말로 풀어야지 여기까지 와서 나를 혼자 내버려두다니! 그 사람한테 나는 이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남자는 쏘다니며 쓸쓸해진다. 화가 나서 나왔지만, 밤바다를 연인과 싸우고 혼자 걷는다는 것은 참 낭만적인 일이고 이에 스스로 취하면 괜히 쓸쓸한척 폼을 잡게 되는 것.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바에 따르면, 그렇게 행동하면 또 그렇게 마음이 가는 법. 정말 쓸쓸해지는데, 왠걸! 혼자 걷는 여자가 한적한 밤바다에 내 앞에 있었던 것. 이야... 이럴때 남성의 마음은 무엇일까. 좋게 말하면 낭만인 것이고, 분명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뒷모습은) 예뻤다는 것...

해변에서 만난 여인 많은 예길 들려 주었지 잃어버린 사랑으로 여기에 왔다고
돌아가면 나 역시도 혼자 될거라고 새벽이 오는 바다에 앉아 얘기했지 (재훈)

그 낭만에 취해 어찌어찌 붙잡아 말을 걸어보니,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사랑을 잃고 바다에 왔노라고. 캬.. 밤바다에 이런 고백을 들으니, 달이 비추고 별이 깜빡이고, 어쩌면 작은 모닥불 앞에서 재훈이라는 가객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면 나 역시도 혼자 될'거라고 말하고 만다. 새벽이 오는 바다에 앉아서 말이다. 새벽은 어디서 오는가.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 어디선가? 새벽은 어디에서도 오지만, 어디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는지가 중요하다. 그 중 대표적 '상투적 공간'이 바로 바다. 새벽에 태양이 떠오르며 형형색색 변하는 바다와 하늘. 검은색에서 희뿌연 회색에서 보라, 자주, 적청, 희끄무레하게 푸릏게 되다가, 마침내 붉은 태양이 점점 노랗게 붉은 색을 흡수하며 떠오를 때, 옆에 앉아있던 여인. 함께 이별의 '기억'을 겪고, 신새벽의 태양을 함께 본 것. 캬 태양은 다시 뜬다 이거다.

해변의 여인 야이야야야 그녀와 떠오르는 태양을 우리는 함께 본거야
기다리지마 이제서야 만났어 이제 다시 이별없는 사랑으로 만들거야 후∼∼ (재훈&유리)

그런데 한편, 우리의 유리라는 이름의 가객은 분한 맘에 맥주 한캔 따고 소주 반병 비우고 잠이 들고 말았던가.. 뭐하고 있었는가. 갑자기 클라이맥스라고 맞지도 않는 가사를 함께 부르는 이유는 뭘까.. 대미는 장식된다.

해변의 여인 나와 함께 다시 돌아가는 길에 보았지
예전에 그녀 멋진 자동차에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걸 (재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충 이런 느낌?)

재훈이라는 가객 속으로 희희낙낙 '해변의 여인'과 돌아가는 길에 목도한다. '예전에 그녀' 벌써 멋진 자동차&남자를 꽤찬 것을. 그러니 앞서 클라이맥스에 '기다리지마 이제서야 만났어 이제 다시 이별없는 사랑으로 만들거야 후∼∼'는 유리라는 가객에게도 해당되었던 것!

아. 이 얼마나 해피엔딩인가. 그리고 생산적 발전적인가. 2+2=4. 그리고 재훈은 뒤태든 앞태든 분명 꽤나 괜찮을 '해변의 여인'을 만났고, 유리는 멋진 자동차를 뽐내는 남자를 얻었다. 그래, 이런게 여름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35 관련글 쓰기

Comment

  1. BlogIcon 짐씨네 2007/08/29 08:18

    귀여워...해석과 사진 설명. 이 노래의 여름 휴가 판타지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지만 제대로 실현된 적이 별로 없는...실로 판타지인 듯. 우후~ 환상이든 현실이든 여름이 홀딱 다 가버리고 말았군.

  2. 2007/08/29 09:33

    아.. 그르게요;; 내년 여름을 또 기대해봅니다(?)
    그나저나 지구 온난화로 2090년경되면 겨울이 없어진다는데..
    요즘 기후보면 완전 코스타리카에요 스콜! 우기! 헐.. 좋은데! ㅋ;;;

  3. BlogIcon coolya 2007/09/04 09:38

    제가 깜빡하고 <시 천천히 읽기> 폴더를 빼먹었네요..대중음악과 가까운 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에 넣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도, 피서하면 바다이고, 바다하면 사랑이다. 곧 피서는 사랑! 아직 20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누구나 그러한지, 바다라는 곳은 미지의 사람과 낭만적인 만남이 있는 곳으로 느껴진다. 여름의 그룹 '쿨'이라는 가객이 노래했던 것처럼!

이런 피서, 바다, 사랑의 세 키워드를 만족시키는 시로는 올해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의 표제작인 강기원의 <바다로 가득 찬 책>을 들 수 있다.



바다로 가득 찬 책*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첫 연부터 독자로 하여금 설레게 만든다.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이 문장에서 시가 시작된다. 사람/사랑=책=바다 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단순히 사람-책 또는 사람-바다라는 단순한 유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세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고정되지 않으며 풍부한 의미를 들어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성적인 비유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바다-책 이라는 이미지는 수동적이며 '여성적'이다. 그러나 시가 전개되어가면서 그러한 성적 구분은 경계가 지워진다. '범람하는 물'을 내가 '쓰다듬'으면 내가 깍이고 내 '틈 속으로' '너의 체온'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여-남이라는 구분이 아니라, 네가 여자였다가 내가 또 여성이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너무 쉽게 '사랑'을 완전한 합일이라고 노래하지는 않는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라는 시인의 언어는 얼마나 간절한가. 가 닿을 수 없는 타자. 문자라는 표면에서 두레박을 내려 길어올리는 것은 몇줌의 의미 뿐. 우리는 책=바다=사랑이라는 연결 속에서, 책/바다/사랑의 '해연'에 가닿으려는 시인(사람이자 문자로 작업하는 기능공인)의 절망을 엿본다. 이는 바꿔말하면, 이 시(문자/책)를 읽는 독자의 절망이기도 하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이미지의 놀라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는 간신히 ‘대륙붕’에만 도달할 뿐. 타자는 끝없이 깊다. 그럼에도 그러한 타자의 ‘부력’은 한없이 타자의 그 깊이로 자아를 끌어당긴다. 그러한 타자는 바다 속 숨겨져 있는 산호초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편안한 진동으로 화자에게 쉴 곳을 주기도 한다. 타자의 깊은 속에는 마주대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도사리기도 하지만 (해골들의 헤버러진 입) 그 말할 수 없음의 지점에도, 그 균열의 지점에도, 바다는 타자는 끊임없이 파도치며 부드럽게 화자에게 어떠한 파장을 보낸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의 끈이고 관계이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일 터이다. 또 달리보면 그것을 우리가 '책'또는 '의미'의 전달 내지는 이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화자는 그 진앙지, 그 ‘너울거림’의 진앙지를 찾아 ‘너=바다’라는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끝내 보지 못한다. 그러나 또 본다,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를. 타자는 기실 ‘너’ 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 속에도 있었던 것. 혹은 ‘너’ 속의 ‘나’가 만들어 내는 것.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라는 사랑에 대한 아름답지만 또 환상적인. 그래서 공허하고 덧없는 ‘환幻’이지만 그래서 더 애달픈. 그것이 ‘너/타자’와의 사랑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로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를 보고 있지만, 그러한 환상을 그래도, 같이 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사랑은 곧 모든 관계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사람/사랑=책=바다. 시인은 바다로 가득 찬 책을 열어보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홑겹의 환어 지느러미를 본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34 관련글 쓰기

Comment

지난 번에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바다'를 다녀왔다(?). 이번에는 '여유로운 전원'이다. 바쁘고 일상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전원생활'처럼 향수에 젖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리고 그 전원의 삶을 잘 그렸다고 평가되고,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시로는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있다. 물론 우리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읽어냈던 방식처럼, 이 시도 그닥 '일반적'이지는 않게 읽어내려 한다. 이번 피서를 시골 들로 간다면, 역시 여러 사람이 몇 번쯤 들어봤을 법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외워주고, 쫌 쌩뚱맞은 썰을 다시 풀어내 보자.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마지막 연 '왜 사냐건 웃지요'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이 시는 보통 안분지족한 삶의 태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화자의 어조이다. 화자는 독백이 아니라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겠소’ ‘~지오’ ‘~있오’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지금 화자가 남으로 창을 낸 작은 초가집에서 안분지족한 삶을 살면서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갑자기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고 자신의 소망을 표출하게 된 것일까. 화자는 계속 자신의 상상을 이어가면서, “밭은 조그마한 ‘한참갈이(새참 한 번 먹을 동안이면 갈아 버릴 수 있는 작은 밭)’이면 되겠고, 구름이 꼬이든 말든 새 노래를 들으면서 살거야. 강냉이가 익었을 때 자네가 놀러오면 함께 먹자고. 그런데 이런 내 삶에 어떤 목적이 있냐고? 왜 사냐고? 왜 사냐고 물으면 난 웃겠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상상 속에서의 삶은 안분지족한 삶이며 자연친화적인 삶이다. 그리고 이것을 꿈꾸며 상상하고 있는 화자는 지금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화자가 이러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서 꼭 이에 대한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화자가 상상하는 내용을 ‘안분지족, 자연친화’로 규정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 화자, 또는 왜 이 시인이 이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보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시인 김상용은 이 시가 발표된 당시 33살의 나이로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때는 1934년. 당시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신간회가 해소되고, 만주사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죽은지도 2년여가 흘렀다. 점차 식민지 시기 지식인들은 해방에 대한 전망과 자신감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일본을 파시즘 국가로 만드려는 쿠데타도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화자는 갑갑한 현실에서부터 벗어나서 ‘남으로 창을’ 내고 밭으로 ‘한참갈이’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이상향은 단지 시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화자는 ‘남으로 창을 내고’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남으로 창을 내겠소’하는 소망만을 시로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암담한 상황 속에서 쓰인 시였기에 이처럼 담담하고 소박한 화자의 소망이 더 진솔하게 표현되어 70년 후의 우리가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 신간회 해소와 만주사변 후, 지식인들의 암담한 상황 속에서, '남으로 창으로 내겠소'라고,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적는 시인을 생각하며 다시금 이 시를 읽어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32 관련글 쓰기

Comment

피서철이다. 물론 비가 주룩주룩 오다말다 하지만, 그래도 바다로 산으로 떠나는 시기. 이럴 때 떠오르는 시가 몇편 쯤 있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처음 제시하는 시가, 우리가 항상 교과서에 '근대시'의 첫머리에 놓여있다고 배우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니 너무 하지 않는가. 이렇게 '재미없는' 시를. 그러나 이 시도 그렇게 재미없지만은 않다. 이번 피서로 바다를 간다면, 바다를 바라보며 주위 사람들 다 제목은 들어봤을 이 시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자! ^^;



해에게서 소년에게      -최남선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슨다, 무너버린다.
태산(泰山) 같은 높은 뫼에 짚채같은 바위돌이나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디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콱.


처……ㄹ썩,텨……ㄹ썩,텩,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를 이 있건 오너랴
쳐……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쳐……ㄹ썩, 텨……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쳐……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世上) 저 사람 모다 미우나,
그 중(中)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膽) 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才弄)처럼, 귀(貴)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少年輩), 입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당시 사회나 최남선의 의도에 맞추어서 이 시를 해석하자면 이 시는 바다라는 개화의 문물이 들어오는 공간과 하늘이라는 순수 공간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설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비되는 땅이라는 공간의 바윗돌, 태산 같은 자연물이나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 존재로서 변화하여야 할 조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소년’은 앞으로 개화를 이끌어갈 존재로서 바다라는 개화의 문물이 들어오는 공간이 사랑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해석은 문학사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이 시를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읽는 방법은 또 무엇이 있을까? 왜 바다는 소년을 좋아하는 것인지를 내재적으로 생각해보자.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첫 번째 단계는 시에 있는 정보로만 시를 해석하는 내재적인 접근법이다.


왜 바다는 소년을 좋아한다고 시인은 생각하게 되었을까. 바다는 어부가 아니라, 고관대작이 아니라, 딱히 ‘소년’을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름이 되면 옛날이나 요즘이나 피서를 간다. 물론 옛날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가지는 못했으나, 식민지 시기에도 바다는 분명 좋은 피서지였을 것이다. 그러면, 피서지로서의 바다를 상상해보자. 바다를 가장 좋아하는 아이들, 강아지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 때 우리는 바다에서 뛰노는 소년들(이 당시 ‘소년’이라는 단어는 소녀와 소년을 함께 지칭하는 어휘였다.)과 부드럽게 파도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다. 이를 시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바다가 소년을 좋아한다라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어부들은 궂은 날이나 비오는 날에도 바다에 나가고, 실연한 어른들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바다와 어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노는 풍경은 언제나 잔잔한 바다와 맑게 빛나는 햇살 아래일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바다가 잔잔할 때만, 소년들이 바다 곁에서 뛰어노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적인 상상력과 결합하면, ‘바다가 잔잔할 때만, 소년들이 바다 곁에서 뛰어논다’에서 ‘바다는 소년들을 사랑하기에 소년들이 바다 곁에 뛰어놀 때는 바다가 잔잔하구나’라는 시적인 관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적 발상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읽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에게서 어부에게’ ‘해에게서 할아버지에게’가 이상한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somun.info/trackback/33 관련글 쓰기

  1.  삭제

    SUBJECT 혼자 앉아서 - 최남선

    2008/02/23 13:45 | TRACKED FROM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혼자 앉아서 최남선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가끔 쓸쓸히 혼자 생각할 때에 나의 생각이...(물론 나만 그런 생각은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노래되었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한 것이다.

Comment

이전 1 다음